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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55회 정기연주회(글_강지영)

  • 작성일2019-11-18
  • 조회수2565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55회 정기연주회 
- 박영민의 말러 제9번 
2019. 11. 7. (목)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말러와 함께 한 부천필의 기나긴 여정을 돌아보며 
 
2015년 박영민 상임지휘자의 취임과 함께 시작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말러> 시리즈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눈앞에 두고 있다. 2015년 1월 <말러, 자연과 삶, 그리고 죽음 I>이라는 부제와 함께 교향곡 1번 ‘거인’으로 포문을 연 이 시리즈는 같은 해 교향곡 5번과 6번, 그리고 2016년에 교향곡 4번, 7번, 2번을 차례로 섭렵한 후, 2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2019년 올해 3번과 9번 연주로 이어졌다. 박영민 지휘자의 이 <말러> 시리즈에서 아직 연주되지 않은 8번 교향곡은 내년에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2020년 11월 2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9개의 교향곡 중 마지막 하나를 남겨놓은 이 시점에서 2019년 11월 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부천필의 제255회 정기연주회는 말러와 함께 한 이 단체의 기나긴 여정을 돌아보게 하였다.  
1988년 창단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국내에서 말러 교향곡을 전곡 연주한 최초의 관현악단이 되었다. 당시 부천필의 이러한 행보는 단지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의 첫 시도라는 의의를 넘어, 그의 음악을 아끼고 사랑하는 음악애호가들의 양적 팽창과 함께 학술적인 연구와 전문적인 연주의 증가라는 질적 확장 역시 가져 왔다. 그로부터 다시 십여 년이 지난 2015년 부천필을 이끌어갈 수장으로 박영민 상임지휘자가 부임하면서, 부천필의 레퍼토리는 더욱 다양해졌고 연주 스타일 역시 풍성한 사운드를 바탕으로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다채로운 시도를 하는 가운데서도 취임과 동시에 다시금 말러를 꺼내든 박영민 지휘자 덕분에 부천필은 특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굳건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죽음과 삶에 대한 말러의 통찰력 교향곡 9번 
공감과 설득력 지닌 부천필의 연주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말러의 교향곡 9번을 두고 후대의 여러 음악가들과 학자들은 ‘죽음’과 연관하여 해석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편의 단편 스케치만을 남겨놓은 마지막 작품을 제외하고는 그의 생애 마지막 교향곡이기 때문이다. 말러는 베토벤, 슈베르트, 드보르작, 브루크너 등 여타의 선배 작곡가들이 아홉 번째 교향곡을 작곡한 후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앞선 작품에 교향곡이라는 장르 명칭 대신 <대지의 노래>라는 제목을 붙인 바 있었다. 그리고 그가 평소 앓고 있었던 심장병 증세의 심각성을 깨달으며 스스로 죽음의 예감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인 1909년 여름 새로운 교향곡 작업에 착수하는데, 그도 더는 피하지 못하고 1910년에 완성된 이 작품을 9번이라 명명하고서는 이 곡의 초연을 보지 못한 채 1911년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생애에서 이 작품의 이러한 위상과 함께, 자필 악보에 남아 있는 작곡가의 메모들 역시 교향곡 9번을 ‘죽음’에 관한 해석과 연관하게 만든다. “오 젊음이여! 사라졌구나! 오 사랑이여! 가버렸구나!”(1악장 267마디)와 “안녕히! 안녕히!”(434마디)가 바로 그렇다.  
그러나 과연 이 작품을 ‘죽음’으로만 해석하는 게 온당할까? 평생 음악을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 부딪히는 싸움터”이자 “투쟁의 매체”(로스, 『나머지는 소음이다』)로 여겼던 말러에게 교향곡 9번을 ‘죽음의 교향곡’으로 보는 해석은 어쩐지 억울한 면이 있다. 1907년 12월 미국 뉴욕에서 지휘자로 활동을 개시한 말러는 쉰 살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낯선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1909년 브루노 발터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나는 모든 것을 이토록 새로운 빛 속에서 보고 있다네. [...]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삶에 대해 목말라 하고 있네.”라고 적고 있다. 즉 이 시기 말러의 감정 상태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 이별에 대한 체념과 허무함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삶에 대한 강한 애착과 긍정,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과 희망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 시리즈의 모든 연주에 암보로 임하는 박영민 지휘자의 자신감은 바로 이러한 복잡하고 중의적이며 양가적인 말러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 오는 듯하다. 부천필은 여러 다양한 지역적 전통이나 서로 다른 감정의 층위, 나아가 표면적 질감이나 음색에 이르기까지 대조되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것과 동시에 충돌하기도 하는 말러의 음악을 지휘자만큼이나 잘 이해하여 그의 해석에 힘을 실었다. 1악장에서는 죽음의 분위기가 실린 체념적인 1주제와 그에 극단적으로 반대되는 저항적 성격인 2주제의 대비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박영민 지휘자와 부천필 연주자들은 작품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바탕으로, 절망에서 환희로 때로는 빛에서 어두움으로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말러의 색깔을 포착해 냈고 이를 드라마틱하게 표현하였다.  
평온하게 종결하는 1악장을 뒤로 하고, 민속 춤곡 느낌이 물씬 나는 렌들러(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지방의 3박 계열 춤곡)인 2악장이 이어졌다. 춤곡의 리듬감을 살리는 현악기군들 위로 목관과 금관, 타악기들이 갖가지 색으로 채색되는데, 자유롭게 넘나드는 지휘자의 템포 설정이 매우 편안하게 느껴졌으며 이를 여유롭게 받는 부천필의 연주가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2악장에서 그래도 조심스럽게 펼쳐지던 말러 특유의 유머와 날카로움이 3악장 론도-불레스케에서는 극에 달한다. 반음계적인 진행과 불협화로 부딪히는 선율들이 푸가토 기법 위에서 광폭하게 움직인다. 자칫 한 번이라도 흐름을 놓치거나 삐끗하게 되면 악장 전체가 꼬이게 될 우려가 있는데, 박영민 지휘자와 부천필은 집중력을 잃지 않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는 인상을 받았다. 1악장에서 죽음에 절망하기도 하고 맞서 싸우기도 하다 2악장에 이르러 유아기의 천진난만함과 고향의 정서를 떠올리고, 지난날의 온갖 어려움과 난관을 회상하다가도 승리의 순간을 돌아보는 3악장을 거쳐 드디어 4악장에 도달하였다. 
종결 악장에 무게 중심을 싣는 말러의 여타 작품들처럼, 교향곡 9번의 대미를 맛볼 수 있는 것도 역시 마지막 4악장이었다. 지휘자는 복잡한 테크닉을 사용하거나 다이내믹을 극적으로 표현하여 음악의 표면을 현란하게 장식하기보다, 타협하지 않고 악보에 충실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여러 성부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선율을 우직하게 가져오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선율의 가지들을 섬세하게 조절하였다. 무엇보다 아주 여리게 시작하여 꽤 오랫동안 지속되는 현악기 파트가 압권이었다. 흩어지지 않고 하나로 뭉쳐지면서도 전체를 이끌어가는 연주는 청중들을 고도로 집중하도록 만들었으며, 빈틈없는 현악기군의 촘촘한 짜임새 사이로 금관악기들이 공간을 침투하거나 멀리서 울리는 목관악기의 음색이 공간을 감싸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소멸하듯이(erserbend) 사라지는 마지막까지 호흡하는 것을 잊은 채 몰두할 수 있었다.  
사실 초반부에 연주가 부산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뒤로 갈수록 앙상블은 안정되었다. 현악기 연주자들의 정교하고 세련된 표현이 가능했기에 그 위에 관악기와 타악기군이 각자의 음색을 살리며 제 실력을 뽐낼 수 있었다고 본다. 악기들 간의 밸런스가 살짝 깨지게 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이야말로 ‘라이브’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매체와 장비를 통해 들려지는 음악은 어찌 됐건 연주된 그대로 들려지는 ‘진짜’일 수가 없다. 그리고 이를 통한 작품 감상은 ‘비’정상적으로 매끄러운 연주만을 선호하게 만든다. 반대로 무대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음들의 사건’으로서 실황 연주는 상대적으로 ‘덜’ 매끄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인 완벽함보다 청중과 함께 소통했을 때 감동을 준다. 11월 7일 말러 9번을 연주하는 부천필의 연주가 그러했다. 
약 이십여 년 전, 부천필의 연주로 말러 교향곡 실황 연주의 세계에 입문했다. 화성법과 대위법을 공부하고 악보를 분석하며 말러 전기를 읽고 음악사에서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찾아 읽던 이십대의 젊은 음악학도에게 말러는 이해하기 힘든 작곡가였다. 온갖 것들이 공존하고 충돌하면서 만들어지는 말러의 교향곡은 그의 말대로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룩하는 것”임을 세월이 흘러 불혹을 넘긴 지금에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수많은 요소들과 재료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져 통일성과 균형감을 이루는 옛 음악 세계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전체가 분절되거나 해체되고 파편화된 조각들이 급작스럽게 개입되는 말러의 음악 세계가 설득력 있다. 현재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은가?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안해하면서도 무언가를 욕망하고, 삶의 덧없음을 통탄하다가도 바로 그 일회성이 가진 아름다움을 깨치기도 하는...  
두 번에 걸친 부천필의 말러 사이클은 청중을 성장시켰을 뿐더러, 스스로를 단단하게 단련시킨 계기가 되었다. 한번 만들어진 관현악단의 소리와 정체성은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 속에서도 꾸준하게 전승된다. 물론 두 사이클 사이에 상당수의 단원들이 교체되었을 테지만, 말러에 적합한 적당히 어둡고 무거운 오케스트라의 색채와 섬세한 표현력이 부천필 특유의 색깔로 자리 잡았다고 느껴진다. 오년 후 십년 후에도 부천필의 말러를 들으며 함께 성숙해지기를 희망한다. 
 
 
글|강지영(음악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