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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72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방랑의 여정' (글_송주호)

  • 작성일2021-05-25
  • 조회수925
방랑의 길에서 부르는 노래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72회 정기연주회 ‘Best Classic Series: 방랑의 여정’
2021년 4월 29일(목)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제272회 정기연주회의 프로그램은 바그너와 함께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시벨리우스로 구성되어 홀을 가득 울릴 두터운 화음과 풍부한 음향을 기대하게 했다. 이번 공연을 이끈 관록의 지휘자 정치용은 부천필과 함께 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지만, 상임지휘자가 공석인 올해 상반기에 두 차례의 공연을 이끌었다. 그는 부천필과 함께 한 지난 2월 공연에서 슈만의 가장 난해한 작품 중 하나인 <교향곡 제2번>을 무대에 올렸으며, 이번에는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를 소프라노가 아닌 테너와 함께하고, 실연으로 감상할 기회가 흔치 않은 시벨리우스의 첫 교향곡을 선택했다. 노먼 브레히트가 세계적으로 얼어붙고 있는 클래식 음악 시장을 다시 활성화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레퍼토리와 신선한 프로그램을 제시한 적이 있다. 정치용은 이미 이를 실천하고 있으며, 부천필과 함께하는 순간에도 예외가 아니다.
 

일사불란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서곡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오페라의 형식을 갖춘 초기 작품이지만, 사냥 나팔을 연상시키는 금관의 팡파르와 특정한 대상을 상징하는 유도동기를 사용하는 등, 바그너의 음악 세계를 충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관현악은 금관과 목관, 현악의 동일 악기군으로 이루어진 앙상블이 결합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는 바그너가 음색을 음악의 요소로써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활용했음을 나타낸다. 즉, 음악 자체로 드라마가 만들어지도록 해석하고 연주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특징은 부천필의 연주에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호른 앙상블의 거침없는 음향과 조화로운 균형, 그리고 폭풍과 같은 음량은 거친 비바람을 헤치고 항구로 진입하는 네덜란드인의 배를 연상시켰다. 현악기의 일사불란한 리듬 또한 관객의 주의를 집중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내용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음악이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음악적 긴장이 유지되도록 선율을 끊임없이 흐르게 하고 화음을 해결하기 전에 다른 화음으로 연결하는 등의 음악적 장치들이 이러한 역할을 하는데, 이러한 특징이 생동감 있게 진행되도록 연주한 것이 주효했다.
하지만 관악기들이 화음 연주를 할 때 동시에 시작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다. 관악기의 경우 호흡을 불어넣는 시점부터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연주자가 동시에 소리를 내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고의 연주 단체에 이러한 어려운 부분들을 잘 해낼 것으로 기대하기 마련이다.
 

테너가 부르는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는 소프라노가 아닌 테너 김재형씨가 함께했다. 슈트라우스는 소프라노였던 아내를 염두에 두고 노래를 작곡했기 때문에, 그의 가곡은 항상 소프라노 차지였다. 하지만 많은 도약과 큰 성량, 그리고 상당한 스테미너를 요구하는 특징은 테너에게도 매우 잘 어울린다. 오페라에서는 테너의 노래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장미의 기사>의 ‘이탈리아 가수’나 <카프리치오>의 ‘음악가’는 대단히 힘이 있고 호소력이 강하다. 그만큼 이번 연주는 강한 호기심과 큰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Alfred Kim’이라는 이름으로 <카르멘>, <토스카>, <투란도트>, <아이다> 등에서 주역을 맡아 유럽에서 명성을 얻은 김재형의 슈트라우스도 기대에 큰 몫을 했다.
첫 곡 ‘봄’의 노래 선율은 고음에서 길게 끄는 음이 많아 앙상블의 일원처럼 움직인다. 따라서 음색을 제어하여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김재형은 대단히 밀도 있고 맑은 음성으로 분위기를 이끄는 데 성공했으며, 차별적인 음색으로 관현악을 뚫고 관객에게 전달되었다.
둘째 곡 ‘9월’은 여러 개의 음악적 장면이 이어져 있는 작품으로, 음악의 흐름에 따라 목소리의 표정을 바꿔가며 이에 대응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테너와 관현악이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듯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셋째 곡 ‘잠자리에 들 때’는 자장가와 같이 차분하면서도 온화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노래 선율에 도약이 많기에, 부드럽게 이어 부르면서 간혹 음정이 모호해지고 리듬이 흐트러지곤 했다. 이 경우에는 음정을 정확히 짚으면서 프레이즈마다 다이나믹을 섬세하게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마지막 곡 ‘저녁노을’은, 앞의 두 곡이 차분하게 진행된 데다 이 곡 또한 감상적이고 길이가 길어서, 피날레로서의 음악적 시나리오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관객의 주의가 환기되지 않아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색을 제어하면서 전체의 다이나믹을 섬세하게 설정하는 전략이 필요하지만, 아쉽게도 충분한 해답을 얻지 못한 듯하다. 그렇지만 매력적인 음성은 마지막 가사까지 그 매혹을 잃지 않았으며, 관현악은 마지막 음정까지 전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정서를 놓치지 않았다.
 

이야기가 들리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1번>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제1번>은 구체적인 제목이 없는 절대음악적인 작품이지만, 클라리넷의 긴 독백이나 1악장과 4악장의 쌍둥이와 같은 구성은 초기에 어떤 시나리오로 설계되었음을 의심하게 한다. 실제로 시벨리우스는 이 곡을 작곡하기 직전에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듣고 영감을 얻어 표제 교향곡을 구체적으로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는데, 어쩌면 마음에 담아둔 그 시나리오가 <교향곡 제1번>에 내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가의 마음속에 피어오른 불꽃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는 법이다.
1악장은 팀파니의 은은한 트레몰로를 배경으로 클라리넷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클라리넷 연주자는 프레이즈를 다양한 표정으로 구사하면서, 마치 어떤 말이 실려있는 듯한 느낌마저 받았다. 어떤 면에서는 관객에게 주문을 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독백에 점점 빠져들던 중, 마치 사이렌의 최면에 홀린 선원을 깨우듯 제2바이올린이 강한 트레몰로의 경적을 울린다. 조용한 가운데 메조포르테로 갑자기 등장하기 때문에 악보상 가능한 설정이지만, ‘놀람 교향곡’과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다소 과장되어 보인다. 여기서 큰 감정의 기복을 느꼈기에, 이후 등장하는 대단원에서 감흥이 제한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는 악기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있기 때문에 앙상블을 균형 있게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려운데, 부천필의 연주는 이 점에서 응집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듯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음 현악기를 충분히 두어 무게 중심을 잡은 것은 효과적이었다. 그 결과 집중력 있게 음악적 시나리오를 이끌어갈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금관의 화려한 팡파르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대단원으로 고조되었다.
2악장은 저음으로 차분하게 진행하는 시벨리우스적인 선율이 음악을 이끌었다. 이 경우 선율이 자칫 단조롭게 들릴 수 있는데, 현악기가 호흡이 긴 선율에 아티큘레이션과 다이나믹을 적절히 구사하여 생동감을 불어넣었으며, 감성적인 호소력을 들려주었다. 관악기는 단편적인 제스처를 교환하면서 현악기 선율을 방해하며 적정한 긴장감을 일으켰다.
3악장은 톱니바퀴 뭉치가 돌아가는 듯하다. 지휘자가 톱니바퀴를 돌리는 순간 모두가 동시에 반응해야 하지만, 약간씩 밀리는 모습이 보였다. 모든 구성원이 더욱 공격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에 급하게 진행하면서 분주한 분위기를 만들며, 곧 이어질 국면을 심리적으로 준비할 수 있도록 했다.
마지막 4악장은 길이가 길어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데, 현악기의 저음 선율이 밀도 있는 음향으로 탄탄하게 받쳐주면서 긴장감을 유지했다. 전체 관현악은 이를 이어받아 폭발적이고 날카롭게 반응하며 시나리오를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목관이 독주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필요 이상으로 긴장을 해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은 자연스럽게 발전하면서 진행하기 경향이 있어서, 이런 경우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다소 힘겹게 된다. 그리고 최후의 피치카토가 일치되지 않아 아쉽게 연주를 마쳤다. 그럼에도 부천필이 구현한 전체적으로 풍부한 저음 선율이 만드는 시벨리우스적인 사운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앙코르는 방랑의 아이콘 ‘페르 귄트’를 위해 그리그가 작곡한 <페르 귄트> 중 ‘산왕의 홀에서’를 연주했다. 발랄한 리듬과 재치 있는 선율로, 장시간 긴장되고 진지했던 마음을 밝고 경쾌하게 마무리했다.
 

오래도록 기억될 순간
이번 부천필과 정치용의 연주회는 연주자의 관점에서 한 곡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부담스러운 프로그램이었다. 연주상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는 요즘과 같이 리허설을 충분히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벌어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도전적인 기획과 전체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있는 연주를 들려주어, 그 순간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앞으로도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길 바라며, 섬세한 부분에서 더욱 높은 완성도를 기대한다.
 

글|음악평론가 송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