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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74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혁명’ (글_송현민)

  • 작성일2021-05-25
  • 조회수955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74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혁명’
(2021. 5. 13.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시대의 아픔과 슬픔의 ‘단면’을 느끼게 한, 모차르트와 쇼스타코비치의 ‘단조’
 
‘장조’라고 다 기쁜 분위기도 아니고, ‘단조’라고 하여 다 슬픈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사회와 삶은 단조의 시간을 걷고 있다. 어떤 슬픔이, 어떤 답답함이 함께 하고 있다.
 
5월 13일, 서진이 지휘봉을 잡은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제274회 정기연주회(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 첫 곡은 서곡 없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4번이었다. 단조의 곡이다. 프로그램북을 보니 해설이 이러하다. “단조로 된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장조 조성의 곡들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지만, 상대적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강지영)”
 
무엇이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 곡에 빠져들게 했을까? “한없이 밝고 명랑할 것만 같은 모차르트 음악세계의 또 다른 측면, 깊은 내면의 어두움이 엿보이기 때문은 아닐지 추측해본다.(강지영)”
 
 

깊은 내면의 어두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4번
 
서진과 손민수는 “모차르트 음악세계의 또 다른 측면, 깊은 내면의 어두움”을 조리해나갔다. 모차르트는 이 곡을 작곡할 적에 플루트·오보에·클라리넷·바순은 물론 호른과 트럼펫에 드럼까지 더했다. 여러 악기가 가세했으니, 서진의 지휘로 시작한 총주에는 ‘힘’이 넘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속에 꿈틀거리는 단조의 비극성에 방점을 찍어나간다. 하여, 부천필이 노래하는 인천바다 위 모차르트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안개 속을 뚫고 나와 광명의 빛과 마주했을 때의 기쁨보다, 그 밝음의 시간을 지나 다시 안개 속으로 들어갈 때의 묘한 기운처럼,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는 슬픔의 추를 악곡의 발목에 달았다.
 
이러한 1악장(Allegro)을 지난 2악장(Larghetto)은 피아노 협주곡에 숨은 피아노 실내악 같았다. 서진은 지휘자로서 욕심내지 않았다. 피아노와 관악이 주고받는 신호에 소통의 이물질이 끼지 않을 정도로만 소리의 오와 열을 관리했다. 1악장과 달리 밝은 숨결도 불어넣었다. 단조의 골격을 갖춘 곡이지만, 장조의 피(E플랫 장조)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서진이 c단조로 흐름을 돌려 3악장(Allegretto)을 시작했다. 빠르고 전투적이었다. 드럼까지 가세한 강렬한 시작이었다. 이렇게 그린 밑그림 위로 손민수는 변주의 테마들을 다양하게 채색해나갔다. 1변주는 기교의 색으로, 2변주는 목관악기와 함께 숨결의 색으로, 3변주는 관·현과 함께 화려한 색으로 채색했다. 잠시 클라리넷이 이끌어가는 4변주에서 손민수는 쉼표의 색으로, 5변주는 화려한 재등장의 색으로, 6변주는 오보에와 함께 하는 화음의 색으로 칠했다. 7변주에서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는 c단조의 내면적 어두움으로 강력히 회귀했고, 손민수의 카덴차가 마지막을 장식했다. 지휘자와 피아니스트의 호흡이 깔끔하게 맞아떨어진 마무리였다. 슬픈 곡조를 듣고 관객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환호는 묘했다.
 
앙코르로 손민수는 바흐의 평균율 제2권 16번(g단조)을 연주했다. 음향 좋은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의 허공을 채우는 잔잔한 피아노 소리로 모차르트의 ‘단조’와 바흐의 ‘단조’가 닮아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관객의 환호로 인해 지워질 법한 슬픔의 미학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혁명’의 사운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5번
 
1부는 모차르트의 ‘기쁨의 표면’에 드리워진 ‘슬픔의 이면’을 수면으로 드러낸 시간이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처럼, 서진은 2부에서 쇼스타코비치를 통해 시대와 사회에 내재한 우울의 선율들을 농밀하게 빚어냈다. 교향곡 5번 ‘혁명’이다. 모차르트와 바흐로 이어진 ‘단조’의 기운은 이처럼 2부로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 곡은 1937년 소비에트 혁명 20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연주된 곡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시대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뒤틀린 시대였다고 하지만, 사회로부터 추방과 숙청의 위협을 느꼈던 쇼스타코비치는 기념과 자축의 에너지를 담아 이 곡을 작곡했다.
 
모차르트와 쇼스타코비치를 한 무대에 올린 서진의 선택과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관객에 앉은 내가 판단할 적에 두 곡의 공통점은 ‘대형 편성’이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대로 모차르트는 관악은 물론 금관과 드럼까지 가세하여 기존 피아노 협주곡들을 통틀어 거대한 음형을 그리도록 했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도 다양한 악기군은 물론 악기 수도 증폭시켜 ‘혁명’을 대형곡으로 남겼다.
 
이러한 공통점으로 볼 때, 두 곡을 나란히 올린 지휘자가 선보일 수 있는 묘미란, 모차르트를 통해선 대형의 구조 속에 숨쉬고 있는 ‘섬세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쇼스타코비치를 통해선 대형의 악단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균열되거나 분산되지 않는 균형 잡힌 소리의 ‘거대한 음량’일 것이다.
 
서진의 지휘는 차분했다. 악기들의 소리가 솟구쳐 올라, 거친 음량을 향해 나아갈 때도 그는 칼 같은 제어력을 발휘했다. 흩어지는 화음도, 핏대 선 음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작년 10월,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부천필과 함께 선보인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에서도 이러한 제어력이 곡에 담긴 멜랑콜리함을 청승이 아닌 ‘품위 있는 우울’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날 ‘혁명’ 교향곡에서도 그러했다. 특히 3악장(Largo)을 들을 때에는―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중 4악장에서 보여주었던―서진 특유의 투명한 무게감, 긴장과 이완이 교차하는 묘한 음색의 미학이 돋보였다.
 
관악기군이 강렬하게 울어대는 트릴과 팀파니의 강타, 트럼펫과 트롬본의 거친 팡파르의 기운이 한자리에서 듣는 이를 강렬하게 뒤흔들며, 앞서 말한 ‘거대한 음량’을 향해 나가는 4악장(Allegro non troppo)에서도 서진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음량’을 ‘거룩한 음량’으로 빚는 연금술을 보이며, ‘혁명’을 마무리했다.
 
 

지금, 단조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란
 
이 시대에 단조의 음악을 연주하고 듣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삶의 ‘단면’을 소리를 통해 느끼는 것일 거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 멀리 치우고, 피해 다닐법한 비극의 감성을 일상에 잠시 놓아보게 된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정련과 제련의 과정을 거친 맑고 흐트러짐 없는 소리여야 한다. 자칫 청승으로 흐르거나, 듣기 싫은 울음소리여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날 서진과 부천필이 보여준 모차르트와 쇼스타코치비치는 이러한 걱정을 덜어낸, 투명한 슬픔과 잘 제련된 비극의 소리였다.
 
부천필하모닉의 제275회 정기연주회는 6월 9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로 이어진다. 다양한 지휘자들과 함께 조립되고 있는 부천필 사운드의 매 무대마다 달라지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천필하모닉에 내재된 이면의 ‘부천필(feel)’을 만나고 있다. 다음은 최수열의 지휘로 윤이상의 ‘예악’, 엘가의 첼로 협주곡 Op.85(협연 심준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죽음과 정화’를 연주한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