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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83회 정기연주회 – 흑해의 별 (글_송주호)

  • 작성일2021-12-06
  • 조회수929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83회 정기연주회 ‘흑해의 별’
2021년 11월 26일(금) 저녁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러시아 음악의 르네상스
 
낭만주의가 시작될 무렵,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도 함께 나타났다. 글린카로부터 시작된 19세기 러시아 음악의 이러한 기조는 러시아 작곡가들이 다양한 시각을 갖게 했고, 음악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게 했다. 무소륵스키는 민족주의적인 측면을 바라봤다면, 차이콥스키는 차츰 서구적인 이미지를 지향했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특이하게도 이국적인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비전공자, 프리랜서 작곡가, 제도권 작곡가 등 다양한 입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는 점도 러시아 낭만 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부천필하모닉의 제283회 정기연주회 프로그램은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세 작곡가의 작품들로 구성하여, 러시아 음악의 르네상스를 되새겨보았다.
 
 

극화(劇化)된 무소륵스키

연주회는 무소륵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시작했다. 이 곡은 성 요한 축일 전야에 민둥산에서 벌어지는 마녀들의 축제 전설을 음악화한 교향시로, 이러한 작품들은 이야기의 각 장면을 현장감 있게 그리면서 음악적 효과를 충분히 발휘하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일반적으로 무소륵스키의 원곡은 작곡의 소재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기에 음향적 측면에서는 동시대 음악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다른 작곡가들이 오케스트레이션을 한 작품들이 원작보다 훨씬 자주 연주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무소륵스키의 아이디어가 매우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장윤성 지휘자와 부천필하모닉은 이 두 목적을 모두 이루기 위한 접근이 눈에 띄었다. 금관의 중후한 팡파르와 현의 어수선한 분위기 등 각 악기에 역할을 부여하여 음악 전체를 극화했으며, 이와 함께 각 악기군의 앙상블이 균형을 이루도록 섬세하게 조절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전체 시나리오의 흐름이 다소 선명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무소륵스키의 작품에서 각 부분의 전환이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오히려 이러한 점을 윤색 없이 드러내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일부 지휘자들은 이러한 특징 때문에 무소륵스키의 원작을 선호하기도 한다.
 
 

음색의 향연이 펼쳐진 차이콥스키

뒤이어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이 김수연의 협연으로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중엽부터 유행했던 ‘심포닉 콘체르토’를 지향하고 있다. 관현악은 전체의 역량을 사용하며, 독주는 비르투오소 적인 존재감을 강조한다. 길이도 웬만한 교향곡과 맞먹는다. 따라서 관현악은 그 자체로 완성된 음악적 소리를 만들어야 하며, 피아니스트는 음표들이 관현악을 등에 업고 객석으로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차이콥스키의 이 작품은 구성적 균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부분적으로 관현악이 오블리가토처럼 연주되는 등, 기조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아름다운 멜로디와 화려한 음향으로 얻은 유명세에 비해, 연주자에게, 특히 관현악단에 많은 고민을 안긴다.
 
우선 협연자인 김수연은 1악장부터 이 작품이 손에 매우 익은 듯, 강력한 타건을 요구하는 작품임에도 건반 위를 사뿐히 움직이면서 모든 소리를 정확히 들려주었다. 자신이 음악을 이끌어야 할 부분과 관현악에게 양보해야 할 부분을 명확히 알고 있으며, 이에 따라 페이스를 조절하며 전체 시나리오를 만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독주자로서의 존재감을 세웠다. 관현악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충분히 내며 주도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관현악의 무게감이 음악의 진행을 늦추는 듯했는데, 보다 경쾌하게 연주하여 음색을 화려하게 하고 활력을 끌어올리는 것도 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2악장은 관현악이 한발 물러서서 피아노 독주가 중심에서 노래했다. 그런 만큼 피아니스트는 패시지마다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자유롭고 생동감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홀로 연주할 때와 관현악과 협주할 때 방향성이 달라 보이는 것은 전체의 흐름을 다소 부자연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 악장에서는 관현악이 부분적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다 주도적으로 음악을 이끌었다면 더욱 풍부한 음악적 경험이 가능했을 것이다.
 
3악장은 피아노가 수준 높은 기교로 음악을 주도하며, 관현악은 각 악기가 가진 음색을 특징적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피아니스트의 리드가 대단히 중요한데, 김수연은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이 악장에서 강력한 연주력을 보이며 음악에 원기를 공급했다. 관현악은 현악기와 목관악기, 금관악기에 배정된 역할에 충실하며 화려한 음색의 향연을 들려주었다. 관현악이 단편적으로 들리면서 시나리오의 밀도가 충분해 보이지는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관현악만의 이야기가 명확히 들리지 않은 것이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균형과 효과의 림스키-코르사코프

후반부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그의 이국에 관한 관심과 독보적인 아이디어, 그리고 교과서와 같은 효과적인 관현악법이 어우러진 걸작이다. 또한 각 장면의 이미지가 분명하고 탄탄하며, 잘 알려진 극적인 시나리오 덕택에 작품에 대한 이해도와 공감도가 높다. 그런 만큼 음악을 만드는 지향점이 분명하면서도 이를 구현하기가 매우 까다롭기도 하다. 이에 장윤성 지휘자와 부천필하모닉은 집중력 있는 연주를 들려주며, 관객들에게 이 작품으로부터 기대되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예술적 상상력을 고양했다.
 
1악장은 모든 악기가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시작부터 강한 인상을 주었다. 특히 위용이 가득한 전체 관현악 음향으로 좌중을 압도하며, 실내악적인 부분에서는 극도로 섬세하고 표현적으로 연주하여 극적인 대비를 만들었다. 이러한 진행은 관객의 감성을 자극하여 더욱 큰 감동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전체 관현악 부분은 모든 악기가 균형 있게 어우러지며 완성된 화음을 만드는 데 반해, 실내악적인 부분에서는 주선율이 아닌 악기들이 지나치게 음량을 줄여 음악을 빈약하게 만드는 현상이 있었다. 아마도 무대에서 들리는 음량과 객석에서 들리는 음량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쉽지 않겠지만, 녹음 세션이 아닌 이상 객석을 기준으로 음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2악장은 목관의 연주가 돋보였다. 아티큘레이션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여 프레이즈의 다정다감한 특징을 효과적으로 드러냈으며, 바람결을 타고 들려오는 노래와 같이 감성적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 악장이 가진 리듬을 자연스러운 호흡으로 표현하여 매우 안정감 있게 진행되었으며, 관객은 이에 따라 높은 몰입도로 음악에 집중했다.
 
3악장은 묘사적인 제스쳐가 많아 표현이 용이하면서도, 오히려 같은 이유로 표현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쉽다. 이번 연주는 적절히 균형을 이루면서 제스쳐의 의미와 효과를 훌륭히 표현했다. 또한 급격히 진행되는 장면 전환도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단편적인 특징으로 쉽게 흐트러질 수 있는 관객의 집중을 유지시켰다.
 
4악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다섯 명의 타악기 연주자들이었다. 다양한 타악기들이 번갈아 등장하면서 음향을 과장하여 압도하거나 소극적으로 숨지 않고 적절한 음량과 명확한 음색으로, 신선하고 다채로운 타악기의 향연을 들려주었다. 또한 금관의 팡파르와 목관의 다양한 음색, 현의 팽팽한 긴장감이 조화를 이루면서 이 악장이 요구하는 음악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바이올린 독주의 감각적인 연주는 더욱 빛을 발했다.
 
 

고전의 가치

이번 공연은 서로 다른 지향점을 가진 작품들을 프로그래밍함으로써 조화로운 음향과 극적 표현이 뛰어난 부천필하모닉의 음악적 능력을 발휘했으며,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고전 음악의 미적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음악이라는,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동일한 범위에서 작품을 선정하여, 낭만음악과 민족음악의 경계에 선 당대 예술가들의 고민과 시대정신을 전달했다. 자신의 현재 위치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은 시공간을 초월한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이러한 ‘고전’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순수한 미적 흥미와 시대적 고민이 어우러진 프로그램을 기대한다.
 
 
글 | 음악평론가 송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