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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시립합창단 제157회 정기연주회 - 신년음악회 '김선아 상임지휘자 취임연주회' (글_송주호)

  • 작성일2022-02-07
  • 조회수770
[리뷰]부천시립합창단 제157회 정기연주회 - 신년음악회 '김선아 상임지휘자 취임연주회'
2022년 1월 25일(화)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학구적 연구와 역사적 해석이 주는 신뢰


한 공간에서의 조우

최근 2년간 일하기가 어려워지고 삶의 모습이 달라진 사람들이 많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도 큰 변화로 맞닥뜨려야 했다. 입을 가려야 하는 상황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그 자체를 위험으로 받아들이는 세상, 아무런 대비 없이 맞은 이 변화된 세상을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모든 공연이 취소되고 앞으로의 그 어떤 약속도 확정할 수 없는 불안한 삶은 정신적으로도 큰 위기였다. 그리고 무대를 통해 인류의 유구하고 숭고한 정신을 만나오던 감상자들 또한 역사와의 단절을 경험하며 귀해진 클래식 무대를 찾아 방황했다.

그래도 이 둘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을 찾아가며 만남을 계속 이어갔다. 약속된 공연을 무관중으로 진행하고 인터넷으로 전송하여 더 많은 감상자를 만나기도 했고, 또한 예술의 현장성을 회복하기 위해 마스크를 쓴 채로 노래를 부르는 시도도 했다. 이러한 도전들은 새로운 공연 문화를 개척했고, 호소력 강한 목소리로 여전한 인류의 정신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이러한 흐름에 부천시립합창단이 보여준 활약은 매우 선도적이었다. 2020년부터 이루어진 무관중 공연은 인터넷상에서 수천 명이 시청했고, 2021년에는 마스크를 쓰고 공연을 열어 무대를 갈망했던 합창단원들과 감상자들에게 재회의 감격을 경험하게 했다. 비록 마스크가 고음을 부드럽게 하고 저음의 에너지를 저감시키는 필터의 역할을 하기에 작품이 요구하는 음색과 하모니를 충분하게 얻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파트별 인원의 조정과 적절한 작품 선택 등 다양한 방법으로 최대한 문제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실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즉시 해결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겠으나, 늦지 않게 해결책에 다가갈 것으로 기대한다.

2022년 부천시립합창단의 신년음악회에서도 합창단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막을 열었다. 이번 공연은 수차례 이 단체를 객원으로 지휘해온 김선아 지휘자의 상임지휘자 취임을 알리는 ‘취임연주회’이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김선아 지휘자가 작년에 부천시립합창단과 가진 신년음악회 ‘새해찬가’에서도 연주했던 하이든의 <테 데움>(1800)과 함께, 소프라노 독창곡인 모차르트의 <환호하라, 기뻐하라>(1773), 그리고 슈베르트의 대작인 <미사 제6번>(1828)이 연주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성가곡이면서도 교회의 예배용이 아닌 콘서트를 지향하는 작품이라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교회에서 귀족으로, 그리고 귀족에서 대중으로 감상자층이 이동하는 격변기에 대응하여 나타난 모습이었다. 또한 50여 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안에 빈에서 작곡된 작품들로서 공통되는 지향점을 보이면서도, 작곡가 각자의 서로 다른 경험과 각자가 처한 다양한 배경에서 나온 결과물들로서 차이점도 분명하다. 김선아는 교회음악과 합창지휘를 공부한 지휘자로서, 가장 자신 있으면서도, 동질성과 이질성을 고루 갖추어 완성도와 예술적 수준이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는 지휘자 자신이 창단한 ‘콜레기움 무지쿰 서울’과 함께했다. 이 단체는 역사적 연주관습을 따르는 전문 앙상블로, 보잉, 아티큘레이션, 장식 등에서 그 해석의 방향성을 분명히 했다.
 


하이든, 충분히 공유된 해석으로 얻은 안정감

첫 작품으로 연주된 하이든의 <테 데움>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서 매우 밝고 힘차며, 특히 관현악의 강렬한 팡파르가 곡의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앞서 언급한 대로 김선아와 부천시립합창단은 1년 전에 이 작품을 연주한 적이 있어서, 이 작품에 대한 해석과 서로의 이해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피아노와 오르간으로 반주를 했지만, 이번에는 관현악단과 함께 롯데콘서트홀에서 연주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새로운 해석을 공유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각 패시지의 아티큘레이션과 다이나믹, 음량, 음길이 등이 섬세하게 조정된 것은 이러한 측면에서의 철저한 준비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안정되고 통일성 있는 해석을 이루어냈으며, 감상자에게 음향적으로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이 작품이 가진 팡파르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것은 고음악적인 음정 처리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음향을 만들기 위한 노력, 그리고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이 더해져 만들어진 결과로 보인다. 저음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잔향이 긴 롯데콘서트홀의 특성이 마스크의 문제를 보완하여 청각적으로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지만, 전체적인 음악적 시나리오의 극적 흐름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모차르트, 작품의 본질에 접근

모차르트의 대표적인 소프라노 솔로 칸타타인 <환호하라, 기뻐하라>를 공연장에서 듣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지만, 합창단 공연에 독창 작품이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로 보인다. 독창자 이윤정의 프로필에서도 부천시립합창단과의 관계를 찾을 수 없었기에, 합창단 음악회의 프로그램으로서 이 곡이 적절한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윤정의 노래는 곡의 시작과 함께 정확한 음정과 어떠한 무리도 없는 자연스럽고 우아한 표현으로 온 관중을 흡인했다. 또한 음역과 구문에 따라 음량과 다이나믹을 조절하여 음악 자체가 갖는 극적인 효과도 이루어냈다. 특히 비브라토를 절제함으로써 아름다운 멜리스마가 돋보였으며, 레치타티보를 노래가 아닌 대화로 접근하는 등, 각 음악적 특징이 갖는 본질에 다가갔다. 관현악은 시대악기를 자주 연주해온 경험으로 고급스러운 음향을 만들었다. 하지만 작품이 가진 극적인 흐름과 구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만드는 방향에 집중한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슈베르트, 종교음악이자 낭만음악이자 옛음악이라는 관점들의 배합

이번 공연에서 감상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던 것은 슈베르트의 <미사 제6번>이었을 것이다.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잇는 대작이며, 이후 브루크너의 미사곡으로 이어지는 빈 종교음악의 역사에 중요한 작품이지만, 특히 국내 무대에서 실제 연주로 들을 기회는 드물다. 이것은 종교음악이 이미 쇠퇴하기 시작한 시기로서 그 중요성이 충분히 평가되지 않은 것도 있고, 그렇기에 전문가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충분한 규모의 합창단과 다섯 명의 독창자, 그리고 2관 편성의 정규 관현악단을 구성해야 하는 실질적인 부담이 더해져, 결과적으로 부당한 대우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주는 이 작품을 무대에서 선보이는 기쁨과 함께, 감상자들로부터 정당한 인식을 이끌어내야하는 책임감을 짊어졌다.

김선아와 부천시립합창단의 연주에 깃든 밝은 에너지와 섬세한 표현에서 이러한 두 가지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특히 이번 연주가 바라보는 전체적인 지향점은 역사적인 해석을 기반으로 고상한 사운드를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프레이즈에서 들리는 다양한 표현 양식들은 감상자들에게 음악적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며, ‘Sanctus’와 같이 웅장한 음향에서도 슈베르트 특유의 서정적인 정서를 드러내며 내면적인 감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를 통해 미사곡이 가진 종교적 숭고함과 학구적인 완성도에 낭만음악이 가진 극적인 감성을 더했다. 또한 단원 중에서 선택된 다섯 명의 독창자는 합창단과 독창자 자리를 오가는 변수가 있었음에도 선명한 특징을 지닌 음성으로 훌륭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한 시간에 육박하는 길이를 동일한 지향점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은 깊은 연구와 특출한 집중력의 결과지만, 공연으로서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Domine Deus’나 ‘Et resurrexit’, ‘Dona nobis pacem’ 등 여러 부분에서는 음악적으로 드라마틱한 진행이 있지만, 고급스럽고 우아한 음향이 우선되면서 감상자에게 그 긴장감을 충분히 전달하지는 못했다. 이것은 합창단 인원에 맞는 해석을 선택한 것일 수도 있고, 관현악단이 전체적으로 반주의 역할로 설정되어있기에 이와 맞물려 진행되는 합창도 극적인 특징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필연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객석에서는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부분이다.


 
예술의 힘이 만드는 기적의 연속을 기대하며

잘 연주되지 않는 대작을 도전하는 것은 분명 그 자체로 매우 환영하고 격려할 일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팬데믹으로 리허설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앵콜로 준비한 슈베르트의 <시편 23편>으로 프로그램을 확장하여, 앞서 연주에서 받은 감동을 넘어 감격에 이르게 했다. 올해 1년 동안 계획한 고음악부터 한국음악까지 도전적이면서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원하는 음악적 성과를 거두길 바라며, 공연으로서의 시대성과 현장성도 성취하길 바란다.
 

글 | 음악평론가 송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