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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172회 정기연주회 - Maestro+Virtuoso Ⅲ(글_류태형)

  • 작성일2012-11-30
  • 조회수5717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172회 정기연주회  
Maestro+Virtuoso Ⅲ
 
 
 
 
 
 
격조 높고 따스했던 베토벤의 밤  
 
 
11월 23일 밤 부천시민회관. 객석의 어둠은 밝은 무대와 대비를 더해갔고, 바깥의 냉기가 섞여있던 객석의 공기는 점차 따스해지고 있었다.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 서곡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임헌정이 두 팔을 좌우로 벌리자 총주가 늠름하게 펼쳐졌다. 이내 종종걸음을 걷는 듯한 모차르트 특유의 재기 넘치는 악구가 이어졌다. 목관군은 작품에 신비한 색채를 띄우기도 하고 그늘을 짓게도 만들며 유려하게 소용돌이쳤다. 임헌정은 템포에 절제를 부여해 너무 가벼워지거나 빨라지는 것을 막았다. 부천필의 총주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을 연출한 싱그러운 모차르트의 서곡은 금세 끝이 났다.  
 
 
잠시 후 검은색 스커트에 흰색 상의를 입은 손열음이 임헌정과 함께 무대에 등장했다. 그녀는 특유의 90도가 넘는 각도의 정중한 인사를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청중들에게서 부푼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 이전부터의 행보도 관심거리였지만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준우승한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굳건히 자리매김한 손열음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공연장의 침묵 속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나 역시도 당시 손열음을 누르고 우승한 다닐 트리포노프의 가공할 연주솜씨를 음반을 들으며 손열음이 얼마나 선전했는지를 새삼 깨달았던 기억이 났다. 최근 게르기예프가 지휘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도 불타오르는 연주를 보여주었던 손열음이었기에 적잖이 기대를 품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그의 모든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숭고함과 고고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오케스트라의 전주가 시작됐다. 임헌정의 지휘봉은 우아하면서도 단호하게 움직였다. 또랑또랑하게 제1주제를 연주하는 손열음의 타건이 오케스트라와 교차했다. 손열음의 연주에는 강렬하면서도 뭔가 동경하는 듯하고 간절히 희구하는 듯한 정서가 서려 있었다. 손열음과 부천필은 단조롭게 각진 구축물을 묘파한 것이 아니라, 리드미컬하게 궁륭 구조물을 그려 냈다. 강물처럼 흐르다가도 악센트를 주는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강렬한 음을 건반으로 흩뿌렸다. 1악장 코다 직전 손열음은 영롱하면서도 사색하는 듯한 인상적인 카덴차를 선보였다. 음의 엉킴 없이 선명하게 곡을 압축하는 모습에서 전체를 아우르는 피아니스트의 조망을 볼 수 있었다.  
 
비애감과 애수가 쓸쓸하게 다가오는 2악장은 더없이 인상적이었다. 손열음의 연주는 장기인 모차르트 단조 협주곡에서 보여줬던 투명한 슬픔을 머금고 시작됐다. 현악 파트와 주고받던 피아노의 대화는 영롱하게 이어지다가 시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끝나버렸다.  
 
3악장.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는 커튼을 걷었을 때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발랄하게 비상했다. 카덴차에서 손열음은 흥분의 숨을 죽이고 곡의 실마리들을 차근차근 다잡아 갔다. 그리고 서서히 끌어올리다가 오케스트라와 뜨거워지더니 사뿐히 연착륙하며 곡을 마무리지었다. 객석에서 ‘브라바’가 들려왔다.  
 
 
 
 
 
 
여러 차례 커튼콜 끝에 피아노 의자에 앉은 손열음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2악장을 연주했다. 들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손열음의 연주가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많이 깊어지고, 맑아지고, 강해졌다. 현재 진행형인 그녀가 무대 위에서 이날 같은 설렘을 계속 전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인터미션 뒤 임헌정과 부천필은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을 연주했다. 일관성 있는 프로그램의 선택이 돋보인 대목이다. ‘전원’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같은 날인 1808년 12월 22일(이날 교향곡 5번 ‘운명’도 함께 연주됐다) 세상에 나왔던 작품으로, 동시대의 생생한 결을 공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임헌정은 1악장에서 마치 토스카니니처럼 소리의 기강을 다잡는 모습이었다. 현악기들의 합주는 전원에 당도했을 때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전해졌다. 목관악기들이 새처럼 우짖고 한없이 산책하는 듯한 여정이 이어졌다. 맑은 시냇가를 따라 끝없이 펼쳐진 꿈결 같은 길을 걷는 2악장은 리듬이 흩어지기 쉬운 부분이다. 또 반복이 계속돼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데, 임헌정은 계속해서 악단을 독려해 뚜렷하고 밀도 높은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농부들의 축제를 나타낸 3악장은 좀더 두터운 울림이 아쉬웠다. 긴장이 조금 풀렸으면 더 좋았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이어진 4악장은 일품이었다. 임헌정의 커다란 지휘 동작에 따라 불길한 바람이 불고 한두 방울의 비가 떨어진 뒤 이윽고 세찬 폭풍우로 변하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계속해서 이어진 5악장은 비가 갠 뒤의 따스함과 너그러움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부천필의 5악장 속 시골마을엔 아직 비가 덜 갠 듯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던 눅눅함이 점차 햇빛에 쾌적해질 때쯤 곡은 환하게 끝이 났다. 메인 프로그램인 베토벤 두 곡은 격조 높은 뒷맛으로 남았다.  
 
 
 
 
 
 
커튼콜을 요청하는 부천시민회관의 청중들의 환호에서 부천필에 대한 애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이에 화답하듯 임헌정은 작곡가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바쳤던 작품을 앙코르로 연주했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였다. 주말을 앞둔 가정으로 돌아가는 부천의 청중들에게 쌀쌀한 날씨를 녹여준 따뜻한 선물이었다.  
 
 
글_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