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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창단 25주년 기념음악회 -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 Ⅸ

  • 작성일2013-07-31
  • 조회수4357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창단 25주년 기념음악회  
-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 연주 Ⅸ 
 
 
 
 
 
장엄하게 물든 노을 같은 피날레
 
 
 
임헌정과 부천필은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에 전곡연주회(치클루스)의 문화를 이끈 산 증인이다. 국내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는 뜨거운 반향을 얻으며 말러 신드롬을 일으켰다. 말러 교향곡 외에도 임헌정과 부천필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베토벤 교향곡, 슈만 교향곡의 전곡연주를 진행해 왔다.  
 
지난 2007년 시작된 부천필의 브루크너 교향곡 전곡연주가 7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막을 내렸다. 이날 연주된 곡은 브루크너 교향곡 8번. 부천필의 창단 25주년과 브루크너 교향곡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는 데 더없이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1악장은 신비롭게 시작됐다. 현의 트레몰로와 호른 위로 비올라와 첼로, 9대의 더블베이스가 그어대는 저음이 빅뱅 이전의 카오스를 방불케 했다. 임헌정은 마치 익숙한 도구를 점검하는 시계공처럼 조심스럽게, 그러나 절도 있게 아래위로 지휘봉을 튕기듯 했다. 현의 트레몰로와 함께하는 관악기의 소리뭉치가 초반부터 부풀어 올라 엄청난 다이내믹을 뿜어댔다. 특히 목관과 베이스가 주고받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객석에서 목관이 바로 옆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가깝게 들리는 것도 신선한 체험이었다.  
 
호른 주자들은 호른과 바그너튜바를 갈마드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바그너튜바는 객석 전체가 물에 잠긴 듯한 소리를 냈다. 현의 트레몰로와 오보에, 바그너튜바가 이어지는 부분은 장관이었다. 오보에는 이따금 고독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귀가 얼얼할 정도로 불어대는 금관에 이어 목관, 특히 플루트의 연주가 돋보였다. 
1악장 말미에 브루크너가 ‘죽음의 시계’라고 일컬은 금관의 포효는 세기말의 은유라 할 만큼 준엄했다. 클라리넷 연주가 몰입을 방해한 점은 아쉬웠다. 
 
1악장이 끝난 뒤, 통상적인 악장 사이치고는 약간 긴 공백이 있었다. 임헌정 지휘자가 1악장에서 뭔가 불편했던 점이 있었던지 지휘대를 조절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브루크너가 ‘독일의 야인’이라 지칭했다는 2악장은 그에 걸맞게 금관악기의 연주가 매섭게 다가왔다. 다만 리듬이 좀 더 노골적이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두 대의 하프가 존재감을 과시했고, 현악군의 연주가 두터웠다. 신비감과 불안감 사이 어느 지점엔가 위치해 있을 때가 종종 있었던 1악장에 비교하면 궤도 위에 오른 듯 안정감이 돋보였다. 이따금 앙상블이 어수선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치 깊은 심연에 닻을 내리고 있는 함선처럼 부천필은 파도에 흔들리면서도 엄정함을 잃지 않았다. 불꽃을 쏘아올린 지상의 포연처럼, 2악장이 끝나고도 자욱함이 남아있었다.  
 
3악장을 연주하기 전에 오케스트라는 다시 한 번 튜닝을 했다.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한계 수위를 넘어 밀고 들어오는 악장이었다. 아다지오는 흡사 넘실거리는 현의 바다였다. 곳곳에서 숭고함이 뚝뚝 묻어났다. 한 음 한 음이 귓가를 울리는 하프의 줄에 금빛 물방울이 맺힌 듯했다. 3악장에서 드러난 임헌정의 브루크너상은 기름기 없이 담백한 쪽에 가까웠다. 피부에 와서 울리는 바그너튜바는 다시 한 번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 물속에 잠긴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숨을 쉬기 위해 수면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브루크너의 바다 속 혹은 다른 세계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3악장에 이르러서 부천필은 확실한 안정적인 기반 위에 점층적으로 쌓아가는 음의 축조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3악장이 끝나갈 무렵 객석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문득 2011년 리카르도 샤이가 지휘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이 떠올랐다. 그때도 브루크너 교향곡 8번 3악장에 벨소리가 울렸었다. 어쿠스틱의 숲 혹은 바다에서 만난 전자음의 기습에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임헌정은 아랑곳 않고 가장 벅찬 총주를 주문했다. 부천필의 연주는 풋풋했다. 능란함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느껴진 점이 와 닿았다. 말미에서 바그너 튜바가 흐름을 끊은 점이 아쉬웠다. 
 
곧바로 이어진 4악장, 피날레의 도입부는 외국 오케스트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플루트가 그윽함을 자아냈고, 거인의 발걸음 같은 당당함이 압도적이었다. 결승점이 얼마 남지 않은 장거리주자의 모든 에너지를 그러모아서 내는 듯한 총주에서 빛이 방사되는 듯했다. 
어쩐지 풋풋한 오스트리아 산골의 처녀와 그 위로 드리운 장엄한 저녁놀이 연상됐다. 곡이 끝나도 여전히 귀가 얼얼했다.  
 
기술적인 실수는 여러 군데 지적할 수 있었지만,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영화 ‘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을 체험하고 돌아온 듯한 벅찬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돋보인 점은 기나긴 대곡을 상대하며 처음부터 일관되는 흐름의 키를 놓지 않은 임헌정 지휘자의 끈기였다. 이번 브루크너 교향곡 8번은 전곡연주의 아름다운 황혼이자 마침표였을 뿐만 아니라, 4반세기동안 부천을 음악의 도시로 만든 임헌정의 지도력과 부천필 단원들의 노력에 대한 하나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글_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