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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시립합창단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 아르보 패르트

  • 작성일2017-04-03
  • 조회수2580
[리뷰]부천시립합창단 제129회 정기연주회 -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 5 (Ⅰ) 아르보 패르트 
2017. 3. 24.(금) 저녁 7시 30분, 부천시민회관 대공연장
 
 
 
 
지휘_조익현 
연주_부천시립합창단 
 
아르보 패르트의 조국 에스토니아는 인구 130만의, 발트해 연안의 작은 나라이다. 강국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하여 독일 게르만 문화와 러시아 슬라브 문화가 겹치는 곳이다. 게르만 문화인 루터교회와 슬라브 문화인 정교회를 에스토니아 사람인 아르보 패르트는 정신적 토양으로 가지고 있다. 패르트는 1935년 파이데에서 태어나 세 살 때 라크베레로 이사해서 자랐다. 이곳은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과 러시아의 문화수도 쌍뻬쩨르부르크와 중간에 위치한다. 그래서 그가 들은 최초의 악기소리는 쌍뻬쩨르부르크에서 제작된 그랜드피아노 소리였다. 유럽도시와 별반 다르지 않은 작은 마을 라크베레 음악학교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패르트의 어린시절 에스토니아는 독립국가로서 에스토니아 말을 사용했다. 곧 패르트 나이 5살 때인 1941년 독일군이 쳐들어오면서 에스토니아는 독일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다. 패르트는 이 시간을 나쁜 시절이라고 평가하지 않는다. 5세기 동안 에스토니아는 독일문화권에 속해“ ‘동쪽의 프러시아’로 불렸고, 같은 독일루터교회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독일군과 에스토니아 주민은 사이좋게 지냈다. 나쁜 시절은 오히려 동쪽 러시아에서 왔다고 패르트는 회상한다. 1944년 독일침략군을 반격한 소비예트 군대은 독일군을 쫒아서 에스토니아에 들어왔고 5년 동안 주둔한다. 이런 와중에 그의 형은 러시아 군대에 징집되었다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다른 형은 독일군에 징집되었다가 소비예트 군에게 잡혀서 역시 소비예트 군대의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이런 혼돈의 시절을 10살짜리 어린 아이의 눈으로 경험하게 된다. 다행하게도 패르트의 집은 전쟁의 화를 입지 않고 보존되었으며 그의 집의 피아노도 해를 입지 않았다. 
7살에 음악을 알게 되었지만 음악가로 완성되기에 오랜 시간 오랜 경험이 필요했다. 자신의 길을 찾고 싶은 강한 열망은 패르트를 12음 기법에 열광적으로 메달리게 하였고, 자신만의 길을 찾게 된 다음에는 12음 기법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패르트는 그 시절을 ‘나만의 길, 나만의 세계를 찾으려는 시도’ 였다고 말한다. 전쟁 후, 에스토니아가 소비예트 연방에 들어가게 되자 에스토니아 사람 패르트도 러시아 영향을 받게 된다. 그 가운데 패르트를 작곡과 음악이론을 지도한 하이노 엘러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하이노 엘러는 쌍뻬쩨르부르크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화성학과 관현악법 책으로 패르트를 가르쳤다. 
 
패르트의 ‘러시아 성향’은 모스크바에서 이루어졌다. 1960년대 모스크바에서 안드레이 볼콘스키, 알프레트 슈니트케, 소피아 구바이둘리나, 에디슨 데니소프등과 교류하면서 패르트는 모스크바 아방가르디스트로 소비예트 연방 안에서 진보적인 작품 성향을 가진 작곡가로 분류되었다. 소비예트 작곡가 연맹의 ‘관제 작곡가’들은 이들의 작품활동을 비난하고 방해하였다. 비슷한 1930년대 출생의 이 반항아들은 60년대 비슷한 시기에 소비예트 음악계에 그 때까지 금기시 되어오던 작곡기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충격을 주었으므로 ‘60년대 그룹’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 ‘60년대’ 들은 곧 음렬기법의 한계를 깨닫고 음렬기법을 벗어나게 된다. 서유럽의 기법에 대한 실험을 끝낸 패르트는 인성을 중요한 재료로 사용하면서 종교적 텍스트를 사용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패르트 작품의 성격은 무신론 사회주의를 견지하던 소비예트 정권에 대한 항거의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모스크바를 생활중심으로 삼고 있었지만 패르트는 의도적으로 현대 러시아어 텍스트를 택하지 않았다. 서유럽에 대한 반감(게르만 족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찬 소비예트 사회에서 라틴어는 결코 호감을 갖는 언어가 아니었다. 굳이 라틴어를 사용하여 작품을 쓴 이유는 분명하게 소비예트 정권에 대한 항거의 의미를 갖고 있다. 교회 슬라브어는 고대어로서 현대 러시아와 많은 차이가 있다. 무신론적인 반종교정책을 계속해온 소비예트 정권 아래에서 교회언어, 라틴어를 사용한 것은 패르트에게 반 소비예트적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점이었다.1917년 이후 소비예트 사회에서는 금기였던 교회 슬라브어를 사용하여 작품을 쓴다는 것은 소비예트 사회에서 위험과 고난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이런 소비예트 러시아에 대한 반감은 이후 소비예트가 붕괴한 후 패르트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결과 현대 러시아어를 사용한 작품은 2작품 (2002년, 2005년)밖에 없다. 그것조차 성경에서 인용한 것이다. 패르트가 고어체를 선호한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은, 패르트는 영어를 비롯해서,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스페인어 등의 현대어를 사용한 작품을 계속해서 내놓았기 때문이다. 패르트의 작품세계에서 무신론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반항은 핵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헌대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정권을 향한 반항에 그치지 않고 소비예트 정권을 탄생시킨 사회, 그리고 그 구성원인 개인을 향한 참회와 반성을 촉구하는 정서를 주된 주제로 삼았다.  
 
패르트 작품의 이런 사회성은 90년대 소비예트 연방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더욱 두드러져서 종교적 주제를 가진 작품이 계속해서 발표된다. 패르트의 강한 종교성은 무신론적 종교억압정책을 계속해온 소비예트 정권에 대한 예술적 저항으로 새겨둘 필요가 있다. 패르트는 소비예트 사회 속에 살아온 사람들에게 참회와 반성을 요구하였으며, 그가 서방세계에 명성을 얻게 된 후 부터 그의 작품은 보편적 인류를 향한 무신론 인본주의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기법적으로는 인성을 중요시하고, 더욱 단순함을 추구하며, 여백과 휴지에 대한 남다른 의미부여를 하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한 기류 속에서 패르트가 갖는 독특한 지위는 바로 이런 반인본주의적 반기계문명적인 성격 때문이다.  
 
연주회를 시작하기 전에 지휘자의 해설은 청중을 위한 배려로서 좋은 점이었지만 피아니스트 출연시켜서 < 알리나를 위하여>를 시연하게 한 것은 참 깊은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이 <알리나를 위하여>는 패르트가 작곡가의 대표작으로써 세계적 명성을 얻는 시기를 열어주는 도입부와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간적으로 이른 것이 아니라 이후 패르트 작품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부각되는 개성이 매우 강하게 암시되어있기 때문이다. <알리나를 위하여>가 세상에 나온 후, 이날 연주회에서 연주된 Missa Syllavica 1977, cantate dominum canticum novum 1977 도 이어져 발표되고, 패르트에게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한 기악작품 Fratres, Tabla rasa, Spiegel im spiegel 등의 걸작이 줄지어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알리나를 위하여>로써 패르트 연주회의 첫인상을 만들어내려는 기획자의 의도가 매우 정당하고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Solfegio 1963년, 작곡가가 나이 28세에 쓴 작품으로 매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짧고 단순한 아이디어(도레미파솔라시도)로 만들었다.4성부는 음덩어리를 이루고 시작된 음은 다음 음이 나올때 까지 지속한다. 이런 착상은 같은 해 발표된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Perpetuum mobile에서 12음으로 시도되었던 것을 7개음만을 사용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패르트는 이 작품이 의외로 까다로운 작품임을 주의시켰다. 지금까지 그의 맘에 들은 연주는 극히 드물었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이 날 연주회에 패르트가 와서 들었다면 처음으로 만족을 표시하지 않았을까!  
 
Missa Syllavica 이 작품은 패르트가 최초로 가사를 가지고 만들어낸 작품이다. 패르트는 개인적 감정의 표출을 피하고 전례 가사처럼 객관적인 방법으로 라틴어 가사를 대하려했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막 음절은 으뜸음에 일치하도록 하였고, 글로리아에서는 3성부, 상투스에서는 8성부를 사용하는 등 여러 가지 기법을 발휘하여 전통에 대한 수용을 보여주었다. 전례 음악의 가사를 음절과 음절, 휴지부와 휴지부, 숨표와 숨표대로 그대로 정확하게 읽는 것을 요구하듯이 숨표와 가사를 동일한 무게를 갖는 것으로 연주하기를 바라고 있다. 모든 가사가 동일한 무게를 갖는 것을 때로 잊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이 작품에서 패르트는 가사의 음절을 취급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실험했다.  
이 작품에선 부천시립합창단원들의 개인 기량이 어떤 수준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테너 솔로는 믿어지지 않는 고운 음색과 세련된 발성으로 쭉쭉 벋어나가는 공명된 소리를 들려주었다. 패르트가 원했던 분명한 음절발음을 충분하게 만족시켰다. 
 
Cantate dominum cantikum novum1977 시편 96편 가사를 대하는 패르트의 태도는 남다른 데가 있다. 현대어 영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까지 작품에서 사용하는 패르트지만 라틴어 가사를 사용할 때는 대개의 경우, 보다 신중해지고 진지한 내용이 된다. 이어 연주된 가 내용의 심각함을 전달하는 언어로 라틴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이러한 패르트의 고어에 대한 특별한 의도를 보여준다. 현대어가 아닌 라틴어를 사용해서 특별한 거리감을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스트라빈스키의 <외디푸스 왕><시편교향곡>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게다가 가장 심각한 참회와 애통의 정서(Kanon Pokajanen)를 담을 언어로 교회 슬라브어를 택한 것 역시 고어와 정교회에 대한 패르트의 특별한 생각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내용의 심각함을 기준으로 “현대어< 라틴어< 교회 슬라브어” 라는 언어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하므로 패르트는 자신의 작곡기법에 대한 자신감과 이런 유형의 작품이 살아남아 더 자라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패르트는 소비예트 연방 안에서 커져가는 적대감과 작품 활동의 불편함을 피하여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어 이주하지만(1980) 베를린에 살고 있다. 여기에는 로마 공항의 이민자 행렬 속에 줄서있는 패르트를 소리쳐 불러내어 오스트리아 국적을 얻게한 Universal출판사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국적이지만 베를린에 거주한 헝가리 작곡가 Ligeti와 같은 경우라고 패르트 자신이 밝히고 있다. 이 즈음에 발표된 곡이 De profundis 이다. 남성 베이스의 소리로 시작해서 가사의 심각함과 비통함을 표현한다. 부천시립합창단의 남성 저음은 슬라브 민족의 베이스와 비교하자면 상대적으로 밝고 가벼운 음색을 가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곡의 무겁고 비통함을 표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베이스 도입부에서 요구한 작곡가의 의도를 잘 살려서 가장 필요한 정도의 무게만을 잘 조절해내었다. 
 
Beatus Petronius1977 아마 이 날 연주회 청중들에게 패르트의 미니멀리즘적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었을 것이다. 합창단은 이 곡의 연주에서 패르트 작품을 가장 잘 연주하는 한국 합창단이라는 찬사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Ode (memento) aus Kanon Pokajanen1997 이 곡은 전체가 모두 9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일곱 번째이다. 지금까지 패르트가 만든 곡 가운데서 가장 규모가 크고 연주시간도 길다. 패르트는 가사가 있는 곡의 경우 언어를 세심하게 선택하는데 이 <참회의 카논>은 고대 교회슬라브어를 사용했다. 2년을 이 곡을 만드는데 온전히 바칠 정도로 패르트는 이 작품에 남다른 힘을 쏟았다. 이렇게 가장 큰 규모의 곡을 계획하면서 패르트는 왜 하필 교회 슬라브어를 사용했을까? 이 언어는 고대어일 뿐만 아니라, 소비예트 반종교정책으로 교회와 멀어졌기에 러시아 시민조차도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다. 가사의 선택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패르트가 교회 슬라브어를 택했다는 것은, 패르트 스스로는 그의 음악속에 정교회의 영향을 부인하지만,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텍스트에 교회 슬라브어를 택한 것을 보면 그에게 정교회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준다. 실제로 패르트는 루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후에 정교회로 개종했다.  
I am the true vine 1996년 이와 같이 패르트는 1990년 부터 를 시작으로 영어 가사를 가진 곡을 점점 많이 쓰게된다. 이곡은 영국에서 초연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영국 청중들의 호응을 기쁘게 받아들인 까닭에 영국 청중을 위한 영어 가사 작품이 더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이 날의 연주회 마지막에 등장한 은 영국 합창 전통의 가벼움과 율동적인 리듬을 소화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이 날 연주회에서 지휘자가 이곡을 제 일 마지막에 배치한 의도는 청중들은 곧 알아차렸다. 단순한 구조의 반복과 다이나믹의 변화를 통하여 쉽게 청중의 호응을 얻어낼 곡이었기 때문이다. 제목으로 뽑은 어귀는 수없이 반복되면서 두운이나 후렴구 처럼 들려지면서 리듬적으로 자연스런 호응을 이끄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적절하게 조절되고 효과적으로 쌓아올려진 다이나믹 표현은 이 곡이 어째서 최근 합창 연주회와 콩쿠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지 한 껏 보여주었다.  
 
지휘자의 정확하고도 열정적인 지휘로 이 날 연주회는 자연스럽게 열띤 청중의 박수가 이어졌으며 또 다시 준비한 < 성모송>이 연주되었다. 지금까지 교회 슬라브어로 만든 4곡 가운데서 가장 리듬적으로 활발한 곡이다. 패르트는 물론 라흐마니노프의 <성모송>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완만하고 멜리즈마의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라흐마니노프와 달리 패르트의 <성모송>은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빠르고 재미있는 곡이었다. 아마도 교회 슬라브어가 가진 무게와 거리감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는 작곡가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이 곡의 초연(1990)은 켐브리지에서 영국 합창단을 위한 것이었다. 가사는 교회 슬라브어로 진지한 성가이지만, 세속노래와 같은 리듬을 갖고 있으며, 곡 전체의 정서는 영국적인 밝음으로 가득하다. 전통적으로 밝고 유괘한 영국합창 전통을 표현한 작품이다. 앵콜곡으로 이 유쾌한 곡을 선정한 것은 기획자의 의도가 매우 정확하게 구현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부천시립합창단이 선정한 패르트는 이 날 연주회를 통해서 깊은 감동과 감사를 갖게 하였다. 지금까지 서유럽의 창작품이 갖는 거리감과 부담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작곡가로서 패르트를 새롭게 한국 청중에게 각인시킨 밤이었다. 1970년대 이후 세계 음악계는 신낭만주의, 신조성 음악의 새로운 흐름이 힘을 얻게 있다. 복잡성과 새로움만을 추구하여 청중을 외면하는 실험주의에 대한 반발이다. 패르트를 비롯한 구소련 출신의 작곡가들이 이러한 흐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부천시립합창단의 패르트 연주회는 한국에서 이렇게 역사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앞으로 패르트를 비롯한 구소련 작곡가들의 합창작품이 부천시립합창단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더욱 자주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사실 일본 만 하더라도 패르트와 슈니트케, 구바이둘리나, 데샤트니코프는 익숙한 이름이 된 지 오래다. 부천시립 합창단의 열성이 부천시민을 비롯한 한국청중에게 이런 작품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글: 최용길/음악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