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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바그너의 향연 Ⅲ

  • 작성일2017-06-05
  • 조회수2392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25회 정기연주회 <바그너의 향연 Ⅲ>  
2017. 5. 24. (수) 저녁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합심해 만든 바그너 기적
 
 
 
 
 
무대 위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리하르트 바그너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보이지 않는 짙은 향불이 피어 오르고 있었다. 바그너 튜바, 베이스 트럼펫, 콘트라 트롬본 등 비교적 생소한 악기들이 특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그너 작품 길다는 건 누구나 안다. ‘니벨룽의 반지’는 나흘이 걸린다. 그러나 5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의 연주회는 바그너를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통상적인 음악회의 형식 안에서 바그너의 매력을 착즙해 한 잔의 주스로 청중에게 건네주었다. 박영민이 지휘하는 부천필이 주인공이었다.  
 
작년 6월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바그너 ‘탄호이저’ 콘체르탄테 공연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박영민과 부천필. 이들이 1년 뒤 또 다시 바그너를 들고 나왔다. ‘탄호이저’ 역시 바그너 입문용 레퍼토리로 손꼽히지만,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자면, 올해 공연 쪽이 바그너의 매력을 만화경처럼 다채롭게 보여줬다고 말하고 싶다.  
 
첫곡인 ‘탄호이저 서곡’은 숭고했다. 목관을 현이 이어받을 때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눈 앞에 대해가 넘실거렸다. 일렁이는 파도가 무대를 꽉 채웠다. 8대의 더블베이스가 바다의 깊이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현악군의 보잉은 높이가 일정한 절도가 있었다. 박영민의 지휘봉을 쳐다보는 단원들의 눈동자에서 이번 무대를 준비한 결기가 느껴졌다. 
곡의 마지막 부분에서 원기옥을 모은 듯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눈 앞의 거대한 충돌은 오케스트라의 빅뱅이나 다름 없었다.  
 
이어진 곡은 ‘니벨룽의 반지’ 가운데 ‘발퀴레’ 중 3막 ‘발퀴레의 기행’이었다. 더블베이스 나오기 전 현악기들의 단호한 연주는 일제히 칼을 휘두르는 무사들처럼 매서웠다. 총주에서 일제히 쩌렁쩌렁하게 포효하는 금관악기들에 귀가 얼얼했다. 심벌즈를 비롯한 타악기들과 관악기 현악기가 부딪힐 때마다 청중들은 흥분 속에 젖어 들었다.  
 
처음부터 너무 잘 풀려서일까. 흐름을 잘 유지하던 앙상블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서곡에서 오케스트라의 기세는 한 풀 꺾였다. 초반부터 너무 힘이 들어가 앙상블이 너무 무거웠다. 이러한 가운데 다른 파트에서도 날렵하게 세부를 표현할 여지를 찾지 못했다. 이 작품으로 1부를 마무리하고 2부를 기약했다.  
 
휴식시간 뒤 로린 마젤이 편곡한 ‘무언의 반지(Der Ring Ohne Worte)’가 이어졌다. 제대로 보려면 나흘 걸리는 대작 ‘니벨룽의 반지’. 그 핵심을 축약해서 만끽할 수 있었다. 지난 3월에도 데 바르트가 지휘한 서울시향의 공연에서 선보였던 헹크 데 블리거 편곡의 ‘반지, 관현악 모험’은 14곡으로 이루어졌다. 그에 비해 이번 ‘무언의 반지’는 20곡으로 구성됐다. 바그너의 원작을 좀더 여유 있게 펼치는 느낌이었다.  
 
‘무언의 반지’는 ‘니벨룽의 반지’ 중 서야인 ‘라인의 황금’ 부분 연주로 시작됐다. 라인강의 물결이 굽이치는 부분에서 바그너 튜바가 물에 잠긴 듯한 소리를 실감나게 내 줬다. 바그너튜바가 중간에 한 소절 늦게 들어가 작은 혼선을 빚기도 했다.  
신들의 발할 입성 부분에서는 영화 ‘에이리언 커버넌트’ 중 창조주 웨일랜드와 피조물인 AI 데이빗이 떠올랐다. 
알베리히의 보물을 빼앗으려 니벨하임으로 내려가는 보탄과 로게, 니벨룽의 장면에서는 격렬한 모루 소리가 불꽃을 튀겼다.  
천둥의 신 도너가 휘두르는 망치 장면에서는 트롬본이 웅장했다. 타악기 주자는 커다란 떡메를 나무판 위에 내려치며 천둥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발퀴레’ 부분에서 ‘사랑의 장면’은 전주곡의 격렬한 여운이 남은 채 애틋한 선율로 바뀌어 지그문트가 지글린데를 바라보는 눈빛을 그렸다. 
‘지그문트 지글린데 도주’에서는 까슬까슬한 금관이 귀를 자극했다. ‘보탄의 분노’에서 점차 고조되던 관현악 사운드에는 ‘발퀴레의 기행’ 선율도 잠시 비쳤다. ‘여전사 발퀴레’와 ‘보탄의 작별인사와 불의 마법’을 끝으로 작품은 ‘지그프리트’로 옮겨갔다. 
‘떨고 있는 미메’에 이어 ‘노퉁을 만드는 지그프리트’에서는 엄청난 심벌 소리와 총주가 울렸다. ‘숲의 생동’에서는 목관악기의 세부가 넓은 음향 공간 안에서 귓가에 들어왔다.  
‘용을 죽이는 지그프리트’와 ‘죽어가는 파프너의 탄식’을 끝으로 ‘지그프리트’는 끝을 맺었다. 이제 마지막 ‘신들의 황혼’ 차례였다. 
지그프리트와 브륀힐데의 열정’에 이어 독립적으로도 연주되는 ‘지그프리트의 라인 기행’이 흘러 나왔다. 합창석에는 반다가 위치해 호른 연주가 입체적으로 들렸다. 
‘하겐이 뿔피리를 불어 남자들을 소집하는 장면’에서는 합창석 뒤편에 좌우 반다들이 함께 연주했는데,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지그프리트와 라인강의 요정들’에서는 ‘라인의 황금’ 첫 부분의 선율로 다시 돌아왔다. 
역시 독립적으로 연주되는 ‘지그프리트의 죽음과 장송행진곡’은 물에 잠긴 듯한 바그너튜바가 위용을 다시 자랑했고 가슴을 치는 듯한 연주가 압권이었다. 광택 있는 적갈색으로 떠오르는 향불 같았다. 갈퀴처럼 가슴 속을 파고드는 마성의 관현악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브륀힐데의 자기희생과 구원’으로 압축된 ‘니벨룽의 반지’ 여정은 끝을 맺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느낌이었다.  
 
박영민과 부천필의 연주는 예전 바그너 ‘탄호이저’보다 업그레이드 된 사운드였다. 금관악기만 놓고 봐도 다른 나라 오케스트라들이 부럽지 않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아직 일천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바그너 연주 경력을 고려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박영민 지휘자의 세심한 리드, 독기를 품은 듯 거기에 부응한 단원들의 정신적 기강으로 탄생한 잊지 못할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글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