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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50회 정기연주회(글_정이은)

  • 작성일2019-10-14
  • 조회수1947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50회 정기연주회  
- 쇼스타코비치 시리즈 II 
2019. 9. 25. (수)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부천필은 지난 4월부터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라는 야심찬 기획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정기연주회는 그 시리즈의 두 번째 연주회로, 이날 연주된 두 곡 모두 쇼스타코비치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사실 쇼스타코비치 탄생일이었던 이 날, 그의 음악으로만 채워진 이 날의 프로그램 구성은 그의 음악의 강렬한 표현성을 오롯이 경험하는 데에 충분했다.  
 
이 연주회에 앞서 부천필은 지난 249회 정기연주회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2번을 연주했을 만큼, 최근 그의 작품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9월 초, 알렉세이 코르니엔코의 지휘로 아트센터 인천에서 연주되었던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2번은 부천필의 쇼스타코비치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여놓았다. 이번 정기연주회에서 선보인 쇼스타코비치의 10번 교향곡은 올해 10월 부천필의 유럽 투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기도 해서, 이미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선택 
 
지난 날 부천필이 쌓은 명성의 중심에는 단연 작곡가 말러가 자리하고 있었다.  
부천필은 올해 5월에도 말러의 대작, 교향곡 3번을 멋지게 소화했다. 부천필이 우리 나라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을 완성한 시점으로부터 이제 16년이 지났다. 말러를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들에게도, 청중들에게도 버겁던 시절, 부천필이 선택한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 
 
그 사이 말러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각도 깊어졌고, 그것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들의 기량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부천필은 이 모든 변화들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두 이들이 젊고 패기에 넘쳤기에 가능한 변화들이었다. 
 
 
이제 부천필은 지휘자 박영민과 함께, 새로운 말러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고,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시리즈 음악회로 진행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이들이 선택한 ‘새로운 길’은 쇼스타코비치이다. 왜 하필 쇼스타코비치인지를 진지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 
 
 
왜 쇼스타코비치인가? 
 
근래에 들어서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프로그램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청중들에게 쇼스타코비치는 아직 만만하게 들을 수 있는 작곡가는 아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쇼스타코비치가 구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라는 사실은 우리나라의 분단 상황에서 그의 음악이 수용되는 데에 분명 걸림돌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의 작품은 우리 나라에서는 연주는 물론, 음반 수입도 되지 않았으니, 한국의 청중들에게 그의 음악은 오랫동안 생소할 수 밖에 없었다. 냉전이 과거의 역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말러가 받아들여지는 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생각해본다면 수긍이 갈 문제다.  
 
또다른 이유로는 쇼스타코비치가 20세기의 모더니스트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도 들 수 있다. 일반 청중들이 여전히 현대 음악을 이해하기 어려운 음악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도 그런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과 현악사중주와 같은 매우 보수적인 장르에 많은 곡을 남긴 작곡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의 교향곡들은 18세기와 19세기 작품처럼, 모두 중심 조성을 가진 조성 음악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언어에 익숙한 청중이라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소리로 들어서 알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말러는 낭만주의 시기의 마지막 작곡가로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근래의 음악사 연구는 말러를 음악에서의 모더니티의 출발점으로 본다. 오늘날 그의 음악이 계속해서 연주되고 감상되는 동안 현대 음악의 시작은 어느새 우리의 음악 문화 안에 깊숙이 자리잡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도 마찬가지다. 쇼스타코비치가 남긴 15개의 교향곡이 전세계의 콘서트홀에서 각광받는 레퍼토리로 자리잡은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지난 날 여러 가지 이유로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이 작품들이 이제는 익숙해질 시간이 무르익었다.  
 
부천필의 새로운 기획 연주인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는 단순히 오케스트라 레퍼토리 확장의 측면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콘서트홀에 오는 청중들의 취향을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넓히고자 하는 커다란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이제 쇼스타코비치를 “현대”의 카테고리에 넣기에는 애매모호한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최근 우리 나라에서도 교향곡 5번을 제외하고는 들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그의 교향곡들이 하나 둘씩 무대에 오르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젊고 패기에 넘치는 오케스트라인 부천필의 쇼스타코비치 시리즈는 신선하고, 무엇보다 반가운 변화다.  
 
이 날 연주된 두 곡의 쇼스타코비치는 그가 어떤 색깔을 가진 작곡가인지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곡들이었다. 전반부는 문웅휘의 협연으로 첼로 협주곡 제1번이 연주되었고, 후반부에서는 교향곡 10번이 배치된 프로그램이었다. 이 두 곡을 관통하는 것은,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10번에 대해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의 감정과 열정이었다. 이 두 곡만큼은 연주자들의 열정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것이 이 두 곡이 가진 연주상의 과제이기도 했다. 
 
 
첼리스트 문웅휘와 첼로 협주곡 1번 
 
이런 점에서 문웅휘가 협연한 첼로 협주곡 1번에서 시작 부분의 그 유명한 액센트 붙은 네 음의 스타카토 모티브는 못내 아쉬웠다. 오케스트라 서주 없이 협연자가 먼저 시작하는 1악장에서 솔로가 휘청하니, 박진감이 넘쳐야 하는 오케스트라의 리듬도 불안하게 출발했다. 
 
 
솔로로 시작하는 모든 협주곡이 협연자에게 큰 부담을 주기 마련이다. 이것은 마치 피겨 스케이팅의 중요한 기술인 점프가 연기의 앞부분에 배치되어 있어서 그것의 성패가 전체 연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문제는 시작이 삐끗거렸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페이스를 찾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문웅휘의 첼로는 1악장의 후반부로 가면서 점차 제 페이스를 되찾았다. 흔들렸던 리듬도 점차 안정되어 갔고, 그의 첼로에서 인상적인 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느린 악장인 2악장에서 첼레스타와의 앙상블은 반짝였고, 호른 솔로도 문웅휘의 연주를 빛나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 
 
 
이 곡을 초연한 전설적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는 쇼스타코비치가 그렸던 첼로의 이상이었다. 쇼스타코비치의 마음 속에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소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웅휘의 첼로가 쇼스타코비치의 이상을 자신만의 소리로 탈바꿈 시킨 것을 볼 수 있는 부분은 카덴차로만 구성된 3악장이었다. 문웅휘는 거칠고 날 것 그대로의 강렬한 소리보다는, 훨씬 더 고운 결을 가진 다듬어진 소리로 3악장을 연주했지만, 거기에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침묵을 활용하여 완급을 만들어냈고, 그의 첼로가 가진 표현성은 돋보였다. 
 
문웅휘의 첼로가 가진 이러한 장점은 그가 연주한 앙콜곡인 브리튼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의 세레나타 악장에서 그대로 이어졌다. 역시 로스트로포비치의 연주로 초연되었던 브리튼의 작품을 연주함으로써, 문웅휘는 쇼스타코비치와 브리튼, 로스트로포비치로 이어지는 20세기 음악사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청중들에게 선보였다.  
 
 
박영민과 부천필의 교향곡 10번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날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는 부천필의 사운드로 탄생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이었다. 지난 정기연주회에서 연주된 교향곡 12번, “1917년”의 연주에서도 부천필은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페이소스와 조롱이 한 데 뒤섞인 음악을 멋지게 빚어냈었다. 지난 연주회에서도, 이번 연주회에서도 부천필의 금관악기들은 쇼스타코비치와 좋은 궁합을 선보였다. 금관의 앙상블이 부천필의 트레이드마크라는 말이 괜한 소문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오케스트라의 실내악적인 앙상블들이 빛나는 순간들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령, 1악장에서의 제1바이올린과 제2바이올린의 긴밀한 앙상블, 바순과 콘트라바순의 멋진 조합, 3악장 마지막 부분의 플롯과 피콜로의 앙상블은 교향곡 전체가 빚어지는 과정에서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지휘자 박영민이 보여준 집중력은 이 교향곡 전체가 하나의 일관된 드라마로 전달되는 데에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전체 길이의 절반에 육박하는 1악장에서, 지휘자 박영민은 20분이 훌쩍 넘어가는 이 악장이 하나의 커다란 흐름을 가지고 들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어서 훌륭한 균형감각을 보여줬다. 그의 지휘 아래 부천필은 1악장의 긴장감을 시종일관 잃지 않았고, 이 집중력은 1악장을 넘어서 작품 전체가 응집력 있는 하나로 만드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영민과 부천필은 흐트러지지 않는 집중력으로 쇼스타코비치가 강조한 “열정”을 이 교향곡 안에 온전히 담아냈다. 4악장의 안단테에서 알레그로로 넘어가는 부분의 바순의 화려한 솔로 패시지에서 오케스트라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내는 마지막 화음에 이르기까지, 박영민과 부천필은 이들이 그동안 구축한 사운드가 이제 한국의 청중들을 넘어, 유럽의 청중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능력이 차고도 넘침을 보여주었다.  
 
 
글|정이은(음악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