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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슈베르트의 생애와 예술

  • 작성일2007-05-01
  • 조회수10868
[최은규의 음악에세이] 
프란츠 슈베르트의 생애와 예술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1797년 1월 31일, 교사였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와 폴란드 출신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피츠 사이에서 열두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어린 프란츠의 뛰어난 음악성을 발견하고 여덟 살이 되었을 때부터 교구교회 오르간 주자 미하일 홀처에게 보내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시켰다. 슈베르트는 11세가 되었을 때 수도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학교는 소년합창대원을 양성하고 대학입학을 준비하는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음악에 대한 놀랄만한 진전을 보였지만 일반 교육과목은 그다지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특히 기숙사 생활을 매우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공동생활을 통해 장래의 ‘슈베르티아데’(슈베르트와 그 친구들이 조직한 음악 모임)의 파트너가 되는 많은 학우들을 만나게 된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아들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알고 있었으나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의 초기 습작 악보들을 파기해버렸다. 그가 신학교 시절에 작곡한 작품만도 약 100곡에 이르지만 현존하는 최초의 작품은 그가 13세 때 작곡한 환상곡 G장조다. 그 당시 슈베르트는 궁정악장인 살리에리에게서 음악교육을 받는 한편, 밤에는 제2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실내악과 오케스트라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  
16세 때 변성기로 인해 수도신학교를 떠나게 된 슈베르트는 교원자격을 얻어 그해 가을부터 아버지가 계신 학교의 조수로 들어갔다. 슈베르트는 4년 동안이나 학교의 교원으로 일했으나 곧 자유에 대한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19세의 청년 슈베르트는 우선 아버지의 집을 나와 친구 쇼버의 집에서 살았다. 그 다음 학교를 그만두고 작곡만으로 생계를 도모하는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그보다 늦게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걸었고 연주자로서도 활약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슈베르트의 결심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슈베르트는 일생에 걸쳐 매우 불안정하게 살았다. 1년에 몇 차례나 거처를 바꾸어야 했고, 어떤 때에는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 또 어떤 때에는 아버지의 집에서도 지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학우들의 집에서 거처를 구했고 종종 그들 중 한 사람 또는 두 사람과 한 방을 사용했다. 피아노도 구할 수 없었고, 먹기 위해 필요한 작품은 말할 것도 없이 매일 규칙적으로 여러 곡의 가곡들을 생산해내야 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이름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빈과 외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잡아갔다.  
1816년, 19세의 슈베르트는 당시의 스타 한 사람인 가수 미하일 포글을 소개 받았는데, 포글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활력을 준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였다. 포글은 오스트리아의 모든 무대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을 전파했고 슈베르트와 함께 장기적인 연주 여행을 했으며, 대부분의 경우에는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했다.  
슈베르트가 20세가 된 1817년은 특히 많은 작품들을 생산해낸 해로, 그는 롯시니 풍의 음악양식을 적용한 교향곡 제6번과 서곡, 그리고 7곡의 피아노소나타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1818년, 슈베르트에게 갑작스러운 슬럼프가 찾아온다. 이 한해 동안 슈베르트는 에스테르하지 백작의 젊은 딸들에게 레슨을 하기 위해 몇 곡의 작품을 만들었을 뿐 많은 작품들을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었다.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의 고민이 그의 창작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혁신적 예술가로서의 야망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청중들의 호응을 받고 싶은 욕심도 갖고 있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슈베르트는 창작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차츰 그의 작품세계를 상호 보완하는 두 개의 작품군으로 분리시키면서 갈등을 천천히 해결했다. 한 쪽은 피아노5중주곡 ‘송어’나 8중주곡과 같이 친숙하기 쉬운 작품들이고, 다른 한 쪽은 진보적인 형식과 표현의 내적 필연에 의해 탄생한 음악으로, ‘죽음과 소녀’를 비롯한 후기 현악4중주곡과 교향곡, 후기 피아노소나타, 그리고 광대한 연작가곡 등이 이에 속한다.  
1823년, 슈베르트에게 심각한 병마가 엄습했다. 슈베르트는 긴 병원 생활을 하며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았으며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고 두통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짓궂은 대중들은 그제야 비로소 슈베르트의 음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술가이자 문예애호가인 프뢸리히 자매의 소개로 슈베르트는 빈 악우협회에 가입했다. 이후 슈베르트의 작품은 공식 연주회 무대에 자주 올려져, 말년에는 당시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