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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다시 주목받고 있는 베토벤

  • 작성일2008-04-30
  • 조회수7842
[최은규의 음악 에세이] 
 
다시 주목받고 있는 베토벤  
 
 
 
올해 국내 클래식 공연무대를 장식하고 있는 음악가는 비단 브루크너와 브람스뿐만이 아니다. 올 가을에는 베토벤의 음악이 유난히 주목받고 있다.  
 
10월에 영화 ‘카핑 베토벤’이 개봉된 데 이어 11월 4일에는 무려 네 시간에 걸쳐 첼리스트 양성원의 베토벤 첼로소나타 전곡 연주회가 열렸다. 12월에는 7일간에 걸쳐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전 32곡을 연주하는 백건우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으며, 피아니스트 손열음 역시 이틀에 걸쳐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를 연주한다.  
 
그동안 클래식 공연계에서 말러와 브루크너 등 다양한 음악가들의 작품이 조명을 받아왔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베토벤의 음악은 언제나 클래식음악의 대명사로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아마도 베토벤은 그 훌륭한 음악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인물이었기에 더욱 많은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듯하다.  
 
“황태자여, 당신이 누구든 어쩌다 황태자로 태어난 것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나입니다. 앞으로도 황태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베토벤은 오직 한 사람뿐입니다.”  
베토벤 이전, 귀족 후원자에게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던 음악가는 없었다. 그는 작품 의뢰인의 관습적 취향보다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곡들을 작곡했고 음악청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할 수 있었다. 이는 대규모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콘서트와 악보출판의 활성화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탄생한 베토벤의 음악 속에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정신이 흐른다. 하지만 베토벤의 생활은 결코 평탄치가 않았다. 결정적으로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귓병을 앓게 되는 불행을 겼었다.  
 
“나는 내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지만, 그때 죽음으로 가는 나를 유일하게 붙잡은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내 안에 꿈틀거리는 악상을 모두 음악으로 표현해내기 전에는 도저히 이 세상을 떠날 수 없다.” 
1802년에는 죽음을 결심한 베토벤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유서를 썼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음악을 향한 강한 의지로 극복해내고 이후 더욱 강한 개성을 분출하는 걸작들을 쏟아냈다. 
 
대개 베토벤의 음악은 초기(1790~1800년), 중기(1800~1812년), 후기(1812~1827년)의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는데, 초기의 음악이 고전적인 절제와 우아함을 보여준다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이후 시작된 중기 작품에는 외향적이고 강렬한 감정의 표출이 나타나고, 후기로 갈수록 내밀하고 명상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베토벤은 현악4중주와 피아노소나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드러냈지만 특히 교향곡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베토벤 이후 거의 모든 작곡가들이 베토벤 교향곡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독일의 음악학자 칼 달하우스는 “베토벤 이후의 교향곡은 일직선의 발전이 아니라, 베토벤이라는 ‘항성’ 주위를 맴도는 ‘행성’과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베토벤 자신은 그의 마지막 걸작 교향곡 ‘합창’이 초연되던 날 열광하는 청중의 박수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필자는 부천필 바이올린 부수석, 기획 팀장을 역임 했으며 현재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