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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75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RE:BORN’ (글_이혜진)

  • 작성일2021-06-24
  • 조회수913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75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RE:BORN’ (글_이혜진)
(2021. 6. 9.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전통적인 클래식 연주회장에서 청중은 어두운 조명 아래 침묵한 채 무대를 향해 부동의 자세로 앉아 음악을 감상한다. 핸드폰 벨소리는 물론이거니와 기침소리, 뒤척이는 소리 모두 금물이다. 악장 간 박수도 치면 안 된다. 이는 대략 19세기에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음악회 문화로, 덕분에 연주자와 청중은 연주되는 음악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각해봐야 할 대목은 다소 경직되어 보이는 이 같은 분위기에서 청중은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거나 소외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6월 9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로 부천필 제275회 정기연주회 <RE:BORN>이 최수열 지휘, 심준호 협연으로 개최되었다. 이 날 연주회에서는 윤이상의 <예악>, 엘가의 <첼로 협주곡>, R.슈트라우스의 <죽음과 정화>가 연주되었다. 특히 이번 음악회는 클래식 공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었다. 청중으로 하여금 음악을 단순 감상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음악회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 말이다. 

    이 날 음악회에서는 윤이상의 대규모 관현악곡 <예약>이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전통적인 클래식 음악 공연에 고전·낭만주의 시기의 음악작품이 아닌 현대음악이 연주되는 것은 오늘날의 한국 청중에게 여전히 낯설다. 그러나 이러한 낯섦에도 불구하고 이번 무대는 동시대 서구 현대음악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되, 그 안에서 한국적인 정체성을 구축하고자 했던, 한국 현대음악 작곡가의 고민과 해법을 마주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예악>(Reak)은 1966년 10월 독일의 ‘도나우싱겐(Donauschingen) 현대음악제’에서 초연되었다. 1917년 경상남도 통영에서 출생한 윤이상. 서양음악의 도입 초창기인 일제강점기에 서양음악을 공부했던 서양음악 첫 세대 작곡가이자 한국 현대음악 1세대 작곡가로, 3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빈 악파의 음렬음악 기법, 20세기 중반의 음향음악 등 다양한 현대음악 어법들을 습득했다. 1959년 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한 후 실내악곡에서부터 오케스트라에 이르는 다양한 편성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현대음악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특히 <예악>의 초연이 성공하면서 일약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예악>은 음렬음악에서 음향음악으로의 20세기 중반 유럽 현대음악의 새로운 경향이 반영된 동시에, 여기에 한국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려는 작곡가의 의지가 더해진 작품으로, 이날 연주는 청중에게 서양적이면서 동양적인, 동양적이면서 서양적인 윤이상 고유의 독특한 음향을 선보였다. ‘주요음 기법’(Haupttontechnik) 혹은 ‘주요음향기법’(Hauptklangtechnik)을 통해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윤이상. 이 작품에서 윤이상은 하나의 음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미분음, 비브라토, 장식음, 글리산도, 헤테로포니 등을 통해 단일 음의 다양한 변화 가능성을 탐구했다. 선율 또는 화음을 듣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청중들에게 개별 음 또는 음향들의 나열은 당혹스럽겠지만 마치 자신만의 고유한 생명을 가지고 있듯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되는 음향의 향연은 색다른 경험을 제공했다. 한편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서구 현대음악의 창작 경향은 음렬주의에서 음향음악으로 변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베베른(Anton von Webern, 1883-1945) 식의 지적인 작곡 방식은 점차 사라지고 리게티(Gyorgy Ligeti, 1923-2006)의 <애트모스피어>(Atmosphères, 1961), 펜데레츠키(Krzysztof Eugeniusz Penderecki, 1933-2020)의 <폴리모르피아>(Polymorphia, 1961) 등, 음향 체험이 음악 창작의 주요 요소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반영하듯 윤이상 <예악>의 음악적 무게중심 역시 ‘음향’에 놓여 있다. 이날 연주는 작곡가가 지정해놓은 다양한 아티큘레이션을 세세하고 엄격하게 다루면서, 윤이상 텍스트에 저장된 특유의 음향 미세구조, 음향의 생성과 소멸, 발전의 과정, 그리고 여러 악기가 하나의 소리를 연주할 때 발생하는 “폴리포니 속의 헤테로포니”를 생생하게 재연해냈다. 

    두 번째로 연주된 작품은 영국 출신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Edward Elgar, 1857~1934)의 <첼로 협주곡 e단조>. 총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곡은 1, 2악장과 3, 4악장이 묶여 연주되었다. 이날 협연자 심준호는 단호하고 명료하나 호소력 있는 연주로, 이 곡 특유의 어둡고 비극적인 색채를 첼로의 음색과 함께 잔잔하면서도 묵직하게 채색했다. 더블스톱으로 연주된 독주 첼로의 첫 다섯 마디는 시작부터 청중을 주목시켰으며, 첼로의 제1주제 제시 후 이어진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서로 다른 두 음향체의 환상적인 협업을 보여주었다. 명상적이며 종교적 분위기를 가진 3악장 아다지오. 마치 음 하나하나를 꾹꾹 누르며 음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듯한 독주 첼로의 연주는 절제되어 있으나 깊이 있는 울림을 선사했다. 짧은 휴지 이후 곡은 4악장으로 곧장 연결되었다. 첼로 독주 이후 첼로 앙상블, 전체 현악 파트가 차례대로 가세되어 만들어지는 유니즌은 이 곡의 슬픔을 위로와 감동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지휘자와 협연자의 환상적인 호흡은 최수열 연출, 심준호 주연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했다. 첼로의 음량은 크지 않았으나, 발성은 매우 또렷했으며, 지휘자는 그런 첼로의 소리가 가려지지 않게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세심하게 조율했다. 둘 다 할 말을 기술적으로 분명하게 전달하나, 거기에 적절한 감정을 실었다. 

    이 날 연주회의 마지막 곡으로 독일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 R.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변용>이 연주되었다. 작곡가 자신이 작성한 프로그램에 의거하여 성격 혹은 템포가 대조적인 네 개의 부분들(Largo, Allegro molto agitato, Meno mosso, Moderato)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간의 다양한 고통과 투쟁, 그리고 죽음을 통한 정화라는 형이상학적인 이념과 감정을 그린 작품이다. 문학의 포에지를 음악에 대입한 교향시 작곡가들처럼, 이날 연주는 작곡가의 이야기를 말없이 그러나 설득력 있게 청중에게 전달했다. 죽음, 투쟁, 변용 등을 상징하는 동기들이 다양한 악기들에 의해 발전, 반복, 변형되면서 때로는 강렬한 표현과 극적 절정이, 또 때로는 잔잔한 울림이 만들어졌다. 특히 탐탐(Tam-Tam)의 명상적인 음향 위에 현악과 금관파트가 변용의 모티브를 연주한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슴 먹먹한 감동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수차례의 커튼콜에 최수열은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제2악장 Larghetto>로 화답했다. 마치 죽음과 정화를 지나 청중에게 위로를 건네기 위해 마련된 선곡 같았다. 

    부천필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RE:BORN>. 이번 연주회는 지휘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이기도 했다. 단순히 오케스트라를 한데 모아 주던 지휘자의 역할이 음악의 해석자로 보다 중요해진 것은 19세기에 와서였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히 음악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해당 음악회 전반을 연출하고 디자인하는 것 또한 지휘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관객은 음악회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참여’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청중은 부천필의 연주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몰입했다. 이는 말이 없는 순수 기악음악에 그만의 스토리를 가미해 해석해내는 최수열의 탁월한 스토리텔러 능력 덕분이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 2악장 연주가 끝난 뒤 터져 나온 ‘금지된’ 악장 간 박수나, 마지막 곡인 슈트라우스의 <죽음과 변용> 연주 후 박수 환호 대신 객석에 감돌았던 먹먹한 분위기는 이날의 연주가 들려준 이야기에 몰입한 청중의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청중이 경험한 것은 비단 연주만이 아니었다. 마치 무대 위의 발레수와도 같은 지휘자의 제스처는 청중의 시각을 사로잡았다. 첼리스트 심준호의 협연 후 앵콜곡으로 J. S.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이 연주되었을 때, 최수열이 무대 위에서 그 공연을 함께 감상하거나 무대가 끝나고 걸어 나오는 심준호를 기다렸다가 그를 에스코트하며 함께 퇴장하는 모습에서는 스타의 일상의 모습을 엿보는 듯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예악> 연주를 마친 후 최수열이 윤이상의 악보를 들어 보이며 청중에게 윤이상을 대신해 인사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지금은 고인이 된 작곡가를 기억하고 추모했다. 부천필 제275회 정기연주회. 클래식 음악회가 청중과 소통하는 하나의 이벤트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흥미로운 음악회였다. 

(글_이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