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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282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모스크바를 등지고' (글_이혜진)

  • 작성일2021-11-23
  • 조회수688
[리뷰] 부천필 제282회 정기연주회 -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모스크바를 등지고> (글_이혜진)
(2021. 11. 5. 롯데콘서트홀)
 

악보에 충실한 연주,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이 가미된 연주. 둘 중 어느 것이 좋은 연주일까. 시대마다 다를 테지만, 대략 19세기 이후에 창작된 음악작품들은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다층적인 색깔을 드러낸다. 이 시대 작곡가들이 작품에 새겨 놓은 인간 깊은 내면의 감정 표현, 독특한 개성, 극적 파워, 호소력 등이 연주자의 해석에 따라 다양한 수위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5일 부천필 제282회 정기연주회가 롯데콘서트홀에서 개최되었다. 베스트 클래식 시리즈 <모스크바를 등지고>. 이병욱의 지휘로 연주된 이날 공연에서는 쇼스타코비치,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등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랐다. 차이콥스키가 19세기 후반 서구 낭만주의를 자국의 음악양식과 결합시켜 국제적인 동시에 러시아적인 작곡가 고유의 음악어법을 만들어냈다면,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는 20세기 전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체제라는 정치적 상황과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고전주의 음악어법에서부터 아방가르드의 실험적인 음악에 이르는 다양한 성격의 음악을 창작했다. 이날 연주에서 지휘자 이병욱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 대해, 감정에 매몰되지 않은 절제되고 세밀한 해석을 선보였다.


첫 곡으로는 쇼스타코비치의 ‘축전 서곡 가장조 작품96’이 연주되었다. 평생동안 창작활동에 있어서 당대 정부 문화정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쇼스타코비치. 이 곡은 “힘겨운 전쟁을 체험하고, 적에게 짓밟힌 조국을 부흥시키려는 한 남자의 감정”을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금관의 오프닝 팡파르에 의한 도입부가 다소 성급하게 시작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곧 템포가 안정을 찾아가면서, 작품 특유의 생기 넘치는 속도감과 화려한 선율이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계속해서 이날 연주의 하이라이트인 장유진의 협연 무대가 이어졌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후 도미하여, 뉴잉글랜드 음악원 석사과정과 최고연주자 과정을 마친 장유진. 이번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 라장조 작품35’ 협연 무대는 화려한 열정보다는 서정성과 섬세함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1악장 알레그로 모데라토. 서주부를 지나 현의 피치카토 반주 위에 독주 바이올린이 싱코페이션, 3연음부, 부점 등의 다양한 리듬 동기로 구성되어있는 제1주제를 선명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전통적인 협주곡에서는 오케스트라가 제시부를 먼저 제시하고 독주 바이올린이 다시 한 번 제시부를 반복하는 것이 관례이나, 이 곡에서는 제시부의 첫 시작부터 독주 바이올린이 등장하는데, 장유진은 특유의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오케스트라를 주도해나갔다. 특히 여기에서 지휘자 이병욱은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세심하게 컨트롤함으로써, 독주 바이올린과의 음량 균형을 효과적으로 이루어냈다. 느린 템포의 2악장이 목관 앙상블의 서주로 고요하게 시작한 후, 독주 바이올린이 약음기를 동반한 애수에 띤 선율, 현의 싱코페이션 반주 위의 밝고 경쾌한 선율 등을 연주하는데, 장유진은 대조적인 성격의 이 두 개의 주제를 다채로운 표정으로 연출해냈다. 특히 1악장 가운데 독주 바이올린의 제1주제 재현을 클라리넷이 대위하는 부분은 후기 낭만주의의 서정성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지막 피날레 악장에서 장유진은 더블스톱과 피치카토 등 독주 바이올린의 기량과 화려한 기교를 완벽하고 정확하게 구사해냈다.

이날 공연의 피날레 작품은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제7번 올림다단조 작품131’이었다. 이 곡은 재치와 감정, 전통과 새로움이 효과적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화음의 병렬, 서정성과 건조함의 병치, 역동적 리듬의 교차 등 음의 유희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앞의 두 곡과 달리 고전적이고 절대음악적인 경향이 짙다. 이병욱의 악보에 충실한 해석, 절제되고 섬세한 해석은 특히 이 작품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1악장에서는 오보에와 글로켄슈필, 실로폰의 앙상블이 독특한 음향을 선사하며, 2악장은 호른, 팀파니, 작은 북 등이 클라리넷, 플루트, 피아노, 바이올린의 왈츠와 대조를 이루면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목관, 혹은 호른과 현의 앙상블이 풍부한 표정의 선율을 노래하는 3악장은 낭만성과 서정성을 물씬 풍겼다. 특히 여기에서 하프의 반주에 맞춰 연주된 현의 주제 선율 연주는 부천필 현파트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종소리와 함께 조용하게 사라지듯 끝나는 피날레 악장은 오묘한 여운을 남기며 이날 연주회의 대미를 장식했다.

이번 부천필 제282회 정기연주회에서 표현된 19세기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들의 낭만성과 감정의 수위는 깊지도 얕지도 않았다. 지휘자 이병욱은 낭만적인 성향을 지닌 작품이라 하더라도 최대한 고전적으로 해석해낸 듯하다. 이는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에 치우칠 경우 자칫 지나칠 수 있는 감정표현을 최대한 자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해석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작곡한 이 협주곡이 심장을 파고들만큼 강력한 음악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드는군요.” 차이콥스키가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하면서 메데즈다 폰 메크 부인에게 쓴 편지의 일부로, 작곡가가 언급한 청중의 심장을 파고들 수 있는 극적 호소력과 드라마의 연출은 이번 연주에서는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이런 아쉬움은 후기 낭만주의의 서정성이 드라마틱하게 표현된 차이콥스키의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앙코르 공연에서 어느 정도 해소됐다.

한편 이번 정기연주회에서는 객석의 음악회 관람 매너가 특히 아쉬운 대목이었다. 예컨대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가운데 독주 바이올린의 무반주 카덴차 연주 도중 객석에서 들러온 물건 떨어트리는 소리는 연주자와 청중 모두의 몰입을 방해했다. 이뿐만아 아니다. 몇 차례의 커튼콜 후, 협연자가 앙코르 연주를 시작하려는 순간 울린 청중의 핸드폰 벨소리. 마치 ‘연주’로 착각할 만큼 그 소리가 너무 정교하고 아름다워(?)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지는 해프닝마저 벌어졌다. 연주자의 집중력이 방해되는 순간이었을 텐데, 장유진은 미소로 여유 있게 대처했고, 차이콥스키의 ‘센티멘탈 왈츠(valse sentimentale)’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글│음악학자 이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