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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후기

감동 98 불만 둘 요한 수난곡

  • 작성자*
  • 작성일2007-04-18
  • 조회수6157
부천필 공연은 부담이 없다. 상대적으로 입장료가 싸기 때문이다. 아무리 비싼 좌석도 만 원이다. 가장 싼 티켓은 오천원이다. 하지만 가는 길이 편하지는 않다. 지하철 1호선 중동역에서 내려 한창 아파트 공사중인 현장을 먼지 마셔가며 지나가야 한다. 부천시민회관의 음향시설도 썩 훌륭하지는 않다. 한마디로 전용연주공간으로서는 낙제점이다. 베를린 필이 전용 연주장소를 마련하기 전에 한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한 것에 비하면 다행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어서 빨리 전용홀이 생겨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연주실력이다. 부천필은 기대를 배반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부천필 코러스는 어떨까? 지난 4월 13일 부천시민회관에서는 바하의 요한수난곡 전곡 연주회가 열렸다. 작년의 마태수난곡 연주에 이은 두번째 바하 종교음악 시리즈의 하나다. 안타깝게도 2006년 연주회에는 가지 못했다. 해서 이번에는 기필코라는 각오로 일찌감치 예약을 해두었다.  
 
연주회장에 들어서니 무대 양쪽으로 막이 설치되어 있다. 자막이 제공되기 때문이리라. 아직 공연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글씨가 쓰여 있다. 원래 요한수난곡 연주에는 박수를 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일반 연주회라 박수를 치셔도 됩니다. 다만 연주가 끝나고 지휘자가 손을 내린 후 쳐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마태수난곡 연주가 끝나고 터져나온 박수에 대한 대응책이리라. 과연? 
 
예수가 모함을 받아 죽음에 이르는 역사적인 하루의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이다. 당연히 서양 예술가들에게는 끊임없이 반복 재생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맬 깁슨이 감독으로 나서 만든 <예수의 고통>을 보라. 종교음악 작곡가인 바하에게는 일종의 의무였으리라. 그는 성경의 요한복음과 예수의 수난을 기록한 다양한 시들을 토대로 요한수난곡을 작곡했다. 그 결과 요한수난곡은 마태수난곡과 함께 바하의 대표적인 종교음악으로 불리고 있다. (참고로 그는 다른 세가지 수난곡도 작곡했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 않다). 
 
1부는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해 베드로의 부인으로 끝을 맺는다. 늘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이 두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예수가 생각보다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특히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세번이나 부인할 것이다라고 미리 알려줌으로써 베드로의 고통은 극에 달한다.  
 
2부는 잔혹하다. 예수는 심문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힌다. 음악을 들으며 그 장면을 상상해야 하다니 곤혹스럽다. 특히 사형집행인들이 예수를 소위 유대인의 왕이라 놀리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대목을 들을 때는 눈물이 왈칵 솟곤 한다.  
 
부천필 코러스의 공연은 무난했다. 여기서 무난했다는 말은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복음사가 역을 맡은 조성환씨와 예수 역의 박흥우씨, 빌라도 역의 베이스 정록기씨 등이 제 몫을 다했지만 왠지 아쉬웠다. 그게 무엇인지 꼭 집어냈으면 좋겠지만, 정직하게 말해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내가 지나치게 감상자의 자세에서 연주를 들어서인듯하다. 그야말로 수난곡은 신심에서 우러나와 동화되어야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 그래도 합창은 좋았다. 비올라 다감바를 친 강효정씨와 쳄발로를 연주한 김희정씨도 좋았다.  
 
뒷이야기.  
 
좋은 공연은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여기에 관중의 아우라(분위기)가 어우러지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끝이 아주 안 좋았다. 소위 안다박수(연주가 끝나는 시점을 알고 혼자 젠척하며 치는 박수)가 이번에도 터졌다. 연주는 끝났지만 분명히 지휘자의 손은 내려오지 않았는데 내 뒤에 앉은 어떤 놈(죄송하다. 그나마 이정도 호칭도 그 자식에게는 과분하다) 부라보라는 외침과 함께 박수를 쳐 댄것이다. 목소리가 바리톤 뺨치는 것으로 볼 때 그 자식도 음악 좀 한다는 놈 같은데. 마음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목이라도 잡고 흔들어대고 싶었다. 그 자식은 마태수난곡 연주때 박수를 쳐댄 사람이 지명수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가? 
 
수난곡이 달리 수난곡이겠는가? 지휘자, 연주자, 관객 모두 힘들고 지치게 마련이다. 예수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자는 취지니 참고 또 참아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고통을 강요할 수는 없다. 내 앞자리에 앉은 부부는 아이를 데리고 왔다. 언뜻 불안한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이는 연주 내내 몸을 가만 놔두지 못하고 있었다. 한마디할까 하다가 팩하고 되받아칠까봐 아무 소리 하지 못했다. 왠만하면 아이들은 클래식 연주회 때는 데리고 오지 마세요. 특히 수난곡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