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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우리가 말러를 듣는 이유

  • 작성일2006-11-24
  • 조회수8689
[최은규 음악에세이]우리가 말러를 듣는 이유  
 
지난 금요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는 KBS교향악단의 말러 교향곡 2번 연주회가 있었다.  
지난 7월 부천필의 말러 공연에 이어 또 다시 말러 교향곡 연주회가 이 땅에서 열린 것이다. 경희대와 서울대 오케스트라도 역시 말러의 교향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확실히 몇 년 전에 비해 말러의 교향곡이 자주 연주되는 편이다. 1999년부터 시작돼 2003년에 마무리된 부천필의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회 이후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를 살았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이 국내 음악계에 유행처럼 번졌고 그 열기는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른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말러의 음악은 이중적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단순한 것과 복잡한 것,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반대 요소들의 충돌과 그 놀라운 음향은 때때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계의 모습을 직시하도록 끊임없이 일깨워주기도 한다. 길고 복잡한 말러의 음악이 그토록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낯선 음악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철학자이자 작곡가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역시 관습의 힘으로부터 벗어난 ‘낯선 것’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가 주변의 사물들과 친숙하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들과 전혀 화합하지 못하고 대립과 갈등만 심화시키고 있다면 우리가 느끼는 친숙함은 거짓일 뿐이다. 아도르노는 바로 이 거짓 ‘친숙함’에 맞서 ‘낯선 것’을 주장한다.  
‘낯선 것’은 위험하지만 때때로 ‘낯선 것’이야말로 거짓된 ‘친숙함’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도록 깨우쳐 주며 진정한 ‘친숙함’과의 화해 가능성을 열어준다. 점차 물화되고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들에게 말러의 음악은 아도르노의 표현대로 “주체와 객체의 균열을 풀로 때우지 않고” 차라리 깨어진 채로 놓아두면서 우리의 처참한 현실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 낯선 울림은 비록 완전한 유토피아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부정을 통한 긍정의 가능성만큼은 열어두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계속 말러의 음악을 듣는다.  
 
필자는 부천필 바이올린 부수석, 기획 팀장을 역임 했으며 현재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