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감성의 극치’ 러시아음악
- 작성일2007-01-19
- 조회수8957
[최은규의 음악에세이]‘감성의 극치’ 러시아음악
만일 우리나라 사람에게 클래식 음악가 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대개 차이코프스키라고 답하지 않을까? 적어도 필자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등의 러시아 작곡가들은 국내 음악 팬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 러시아 음악 특유의 감상적인 분위기가 한국인들의 정서에 깊이 호소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런 한국인의 취향을 반영한 부천필의 러시아음악 기행 시리즈의 마지막 공연이 12월 1일 저녁에 열린다. 그날은 특히 멜랑콜리한 정서의 극치를 보여주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이 연주되는데, 이번 음악회를 기다리며 잠시 러시아음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7세기 유럽에서 아름다운 바로크 문화가 번성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엄격한 종교적 규제에 얽매여 중세를 방불케 하는 암흑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음악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러시아 음악에는 비발디와 바흐의 음악에 나타나는 밝은 화성과 자유로운 대위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아무런 화성도 대위 선율도 없는 단성 성가가 불려질 따름이었다. 서방 교회의 단성 성가인 그레고리안 성가가 서유럽에서 그 모습을 감춘 시기가 약 13세기 경인 것을 보면, 당시의 러시아 음악은 서유럽 음악에 비해 약 400년 정도 뒤떨어진 셈이 된다.
17세기만 해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고립되었던 러시아가 단 시간 내에 자국의 독특한 음악 어법을 개발한 것은 18세기 초엽 표트르 대제의 공이 크다. 표트르 대제는 제위 기간 동안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서구의 학문, 예술,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계기로 러시아 궁정에 소개된 서양음악은 러시아 음악을 지배하게 되고, 러시아 음악가들은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이태리 풍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서유럽 음악 문화의 식민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문물의 수입 이후 급격히 밀려오는 외국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던 러시아인들은 외국 문물에 대한 충격과 동경을 느끼며 빠른 속도로 서양 문화에 흡수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갑작스런 서구화에 대한 반발 세력이 거세게 일어났다. 러시아의 음악가들 역시 서구 문물에 대한 이러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의 세련된 음악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서양식의 형식과 화성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그들 나름대로 새롭게 재조직했다. 또한 회화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 뛰어났던 그들의 개성을 살리고 음악과 발레적 요소를 결합시켜 러시아의 독특한 음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서양 음악의 작곡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러시아식으로 소화해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러시아 음악은 오히려 서유럽에 역수입되어 매혹적인 음악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리라.
필자는 부천필 바이올린 부수석, 기획 팀장을 역임 했으며 현재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재직중이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에게 클래식 음악가 중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대개 차이코프스키라고 답하지 않을까? 적어도 필자의 경험으로는 그렇다.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 등의 러시아 작곡가들은 국내 음악 팬들에게 특히 인기가 있는데, 그것은 아마 러시아 음악 특유의 감상적인 분위기가 한국인들의 정서에 깊이 호소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런 한국인의 취향을 반영한 부천필의 러시아음악 기행 시리즈의 마지막 공연이 12월 1일 저녁에 열린다. 그날은 특히 멜랑콜리한 정서의 극치를 보여주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이 연주되는데, 이번 음악회를 기다리며 잠시 러시아음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7세기 유럽에서 아름다운 바로크 문화가 번성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엄격한 종교적 규제에 얽매여 중세를 방불케 하는 암흑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음악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의 러시아 음악에는 비발디와 바흐의 음악에 나타나는 밝은 화성과 자유로운 대위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아무런 화성도 대위 선율도 없는 단성 성가가 불려질 따름이었다. 서방 교회의 단성 성가인 그레고리안 성가가 서유럽에서 그 모습을 감춘 시기가 약 13세기 경인 것을 보면, 당시의 러시아 음악은 서유럽 음악에 비해 약 400년 정도 뒤떨어진 셈이 된다.
17세기만 해도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고립되었던 러시아가 단 시간 내에 자국의 독특한 음악 어법을 개발한 것은 18세기 초엽 표트르 대제의 공이 크다. 표트르 대제는 제위 기간 동안 러시아의 근대화를 위해 서구의 학문, 예술, 생활양식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었다.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계기로 러시아 궁정에 소개된 서양음악은 러시아 음악을 지배하게 되고, 러시아 음악가들은 이태리와 프랑스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이태리 풍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는 서유럽 음악 문화의 식민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양 문물의 수입 이후 급격히 밀려오는 외국 문화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렸던 러시아인들은 외국 문물에 대한 충격과 동경을 느끼며 빠른 속도로 서양 문화에 흡수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갑작스런 서구화에 대한 반발 세력이 거세게 일어났다. 러시아의 음악가들 역시 서구 문물에 대한 이러한 갈등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양의 세련된 음악에 충격을 받고 그것을 모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러시아 고유의 음악을 찾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서양식의 형식과 화성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그들 나름대로 새롭게 재조직했다. 또한 회화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 뛰어났던 그들의 개성을 살리고 음악과 발레적 요소를 결합시켜 러시아의 독특한 음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그들은 서양 음악의 작곡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러시아식으로 소화해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러시아 음악은 오히려 서유럽에 역수입되어 매혹적인 음악으로 살아남게 된 것이리라.
필자는 부천필 바이올린 부수석, 기획 팀장을 역임 했으며 현재 대원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