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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리뷰]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305회 정기연주회 - 리추얼 라흐마니노프Ⅱ (글_정이은)

  • 작성일2023-07-11
  • 조회수441
[리뷰]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305회 정기연주회 <리추얼 라흐마니노프 II>
2023년 7월 7일 (금)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올해는 정말 성대한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인 듯 하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그 어느 해보다도 많은 라흐마니노프를 라이브로 듣고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21세기 한국에서 그의 탄생 150주년을 기리는 성대한 기념 축제가 일년 내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이나 했을까. 우리 음악계에서 보이는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사랑은 분명 그의 음악이 지닌 대중적 생명력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대중들이 클래식 음악에서 듣고 싶어하는 것들이 골고루 들어있다. 유려하면서도 꿈을 꾸듯 부유하는 선율, 선율을 뒷받침하는 화려하고도 대담한 화성, 장대하고 색채적인 오케스트레이션, 무엇보다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드라마틱한 구성. 라흐마니노프만큼 학술적 평가와 대중적 인기가 어긋나는 작곡가도 드물다. 온갖 종류의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했던 시기, 그는 19세기 비르투오소의 전통을 고수하던 마지막 세대의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한 작곡가라는 역사적 평가와 다르게, 오늘날 콘서트홀 무대에서 그의 음악은 언제나 어김없이 커다란 환호를 끌어낸다. 라흐마니노프만큼 청중에게 음악듣기의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20세기 작곡가도 찾아보기 힘들다. 많은 초심들에게는 라흐마니노프가 클래식 음악의 첫 사랑이 된 것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에게 라흐마니노프는 클래식 음악 문화가 본질적으로 풀뿌리 대중에 기초하고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작곡가다. 올해 우리 나라의 공연장에서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이 성대하게 펼쳐지고 있는 만큼, 부천필과 피아니스트 아비람 라이헤르트, 지휘자 장윤성이 빚어내는 라흐마니노프는 어떤 색깔인지, 라흐마니노프에서 드러나는 이들의 강점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번 연주회는 흥미로운 기회였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첫 곡은 아비람 라이헤르트가 협연자로 나섰던 2번 협주곡이었다. 이제는 서울대학교의 동료 사이인 협연자와 지휘자는 이 곡이 요구하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 사이의 긴밀한 공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의 협력 관계 속에서 주목할 만 했던 지점은 라이헤르트의 주도적 역할이었다. 그의 피아노는 때때로 오케스트라를 리드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로서 이 곡에 대한 장악력을 보여주는 지점이었다. 그의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의 서포트를 받기도 하지만 때로는 오케스트라를 서포트해야 하는 입장에서 그의 리더십은 보통의 협연자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유명한 곡일수록 협연자의 색깔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라이헤르트는 첫 소리부터 자신이 어떠한 피아니스트인지를 명쾌히 드러냈다. 침묵을 뚫고 시작되는 도입부의 피아노 솔로는 모든 피아니스트에게 엄청난 중압감을 주는 시작이다. 라이헤르트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연주는 투박하게 들리면서도 선이 굵었다. 그의 파워풀한 연주 덕분에 라흐마니노프의 2번 협주곡의 센티멘털한 감성의 자리에는 롯데콘서트홀의 꼭대기 층에서도 명징하게 들릴 것만 같은 꽉찬 소리가 듣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분명 오케스트라의 육중한 음향을 뚫고 나와야 하는 이 곡의 특성과 롯데콘서트홀의 장소적 특성을 잘 알고 있었던 스마트한 선택이었다.

드라마틱한 1악장에서 라이헤르트의 소리적 특징이 잘 드러냈다면, 서정적인 노래로 가득한 2악장에서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노련함이 돋보였다. 유명한 클라리넷 솔로의 주제에 이어지는 피아노의 응답과 이들 사이의 내밀한 듀엣에서 라이헤르트는 적극적으로 음악을 주도했다. 그의 피아노 속에서 내성의 움직임 역시 명징하게 들렸다. 특별한 제스쳐 없이 절제된 연주를 하다가 악장의 중요한 클라이막스에서 보여주는 움직임은 폭발적이었다. 그 신체적 움직임은 그가 전체의 구성을 인지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 3악장이 그랬다. 3악장은 전체 구조에 대한 이해가 그의 몸 전체로 폭발시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부천필은 라이헤르트의 연주가 잘 빛날 수 있는 성실한 조력자였다. 1악장의 현악기의 분란한 앙상블, 2악장의 클라리넷 솔로의 눈부신 활약, 리듬의 날이 서있었던 3악장 등에서 오케스트라는 좋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후반부는 또 다른 라흐마니노프의 대표작, 교향곡 2번이 연주되었다. 전반부의 모든 포커스가 라이헤르트에게 주어졌다면 후반부는 오롯이 장윤성과 부천필이 끌어가는 무대였다. 교향곡 2번은 분명 라흐마니노프적인 감수성으로 가득한 곡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장대한 서사적 흐름의 완급을 조절하는 것은 오롯이 지휘자의 몫이 된다. 특히 긴 서주부가 있는 1악장의 긴 호흡과 소나타의 드라마적 완급을 조절하는 작업, 그리고 날카롭고 명징한 리듬이 돋보여야 하는 2악장, 호흡이 긴 프레이징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야 하는 3악장,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음향이 빛나야 하는 4악장 등, 각 악장은 지휘자의 역할이 중요해보이는 지점들이 포진해 있다.

장윤성과 부천필은 작품이 요구하는 점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작품 자체가 워낙 선율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는 곡이다보니, 작품은 자칫 잘못하면 단조롭고 지루하게 들리게 된다. 장윤성은 1악장의 긴 서주부의 흐름을 만들어내면서 작품이 가진 짙은 낭만성이 충분히 드러나는 데에 방향성을 둔 듯 했다. 1악장의 서주부에서 금관악기의 앙상블은 그다지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주부의 긴 프레이징을 가져가는 지휘자의 노련함을 통해 앙상블은 곡이 진행되면서 점점 좋아졌다. 어두운 서주부를 지나 소나타의 1주제가 제시되면서 긴박해지는 음악의 흐름도 자연스러웠다. 특히 전체 곡에서 길이적으로 상당한 비중을 가지는 1악장이 다채롭게 들린 점은 지휘자의 몫이 컸다. 지휘자는 전체의 장대한 구성 속에서 강조되어 들려야 할 부분들을 명확하게 짚어냈다. 또한 전체의 앙상블이 조화롭게 들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인 듯했다.

2악장의 시작부분에서 부천필은 이 작품의 인상적인 사운드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현악기의 리듬은 살아있었고, 호른 섹션의 팡파르도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짙은 서정적인 현악기의 앙상블도 안정적인 연주를 들려줬다.

많은 이들이 이 곡의 3악장이 가진 특별한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감이 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각별한 아름다움은 이 곡의 유명세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무거운 부담감은 아무래도 주제를 노래하는 클라리넷 솔로에게 있다. 이날 전체의 연주를 통해서 클라리넷 솔로는 좋은 연주를 들려줬고, 연주의 성공에 많은 지분을 차지했다. 물론 여기에는 현악 앙상블과의 긴밀한 공조, 이어지는 폭발적인 오케스트라 투티 등, 전체 오케스트라의 긴밀한 공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지막 악장에서 부천필은 폭발하듯 에너지를 쏟아냈다. 후반부로 갈수록 오케스트라는 윤택한 소리결을 들려주었는데, 작품의 구성 역시 이들의 연주력을 효과적으로 끌어내는 데에 큰 몫을 했다. 부천필은 이날 연주에서 많은 환호를 받았고, 장윤성은 이에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로 화답했다. 호흡이 긴 곡을 마친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부천필은 보칼리제의 유려한 선율을 좋은 연주로 이번 연주회를 마무리했다.
 

장윤성이 이끄는 부천필은 이날 두 곡의 라흐마니노프를 통해서 자신들의 색깔을 여실히 드러냈다. 장윤성은 짙은 서정성이 있는 큰 편성의 곡에서 장점을 보여왔고, 그런 점에서 그와 라흐마니노프는 좋은 궁합을 보였다. 탄탄한 기본기를 가진 부천필은 지휘자가 생각하는 소리와 구성을 펼쳐보이는 좋은 악기였다. 이들이 다음 행보는 말러의 2번 교향곡이다. 낭만성과 색채적 오케스트라를 넘어서 청중들을 죽음 너머의 천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작업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벌써부터 이들의 새로운 말러가 궁금해진다.
 


글│정이은(음악학자,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 전임연구원)